[대학살 8편] 신의 이름으로 — 기독교 권력이 흘린 피

iam 2026.11.06 2
목록

6aedc478d7c5a.png대학살 8편. 신의 이름으로 — 기독교 권력이 흘린 피

들어가며: 종교를 심판하려는 글이 아니다

이 편은 이 연재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글이다. 먼저 분명히 해두자. 이것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규탄하는 글이 아니다. 기독교는 수많은 이에게 위안·자선·해방의 언어가 되어왔고, 노예제 폐지 운동과 인권 사상의 뿌리에도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 이 연재의 다른 편(노예무역)에서 본 폐지론자 윌버포스와 그랜빌 샤프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성경 구절을 명분 삼아,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대규모 학살들이다. 이교도, 이단, 유대인, 무슬림, "마녀"로 지목된 이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죽어갔다.

이 편의 진짜 주제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이 연재를 처음부터 관통해온 질문의 종교적 버전이다. 절대적 확신이 권력과 결합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7편(스탈린)에서 우리는 "역사의 진보"라는 세속 유토피아가 수천만을 갈아 넣는 것을 보았다. 이념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되고 국가가 그것을 집행할 때, 반대자는 교정 대상이 아니라 제거 대상이 된다. 종교가 세속 권력과 한 몸이 되었을 때도 정확히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러므로 너를 죽여도 된다"는 확신의 구조다.

그 확신의 구조를, 기독교가 유럽의 정치권력과 결합했던 중세·근세의 사건들, 그리고 대항해시대 이후 선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대륙에 수출된 그 구조를 통해 살핀다. 다른 편들과 같은 원칙을 유지한다 — 사망자 수는 추정 범위와 논쟁을 함께 밝히고, 과장과 축소를 모두 경계한다. 특히 이 주제는 반(反)종교 진영의 과장(종교재판 수백만 명, 마녀사냥 900만 명 같은)과 호교론 진영의 축소가 정면충돌하는 영역이라, 숫자를 다루는 데 각별히 신중해야 한다.


1부. 십자군 —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예루살렘, 1099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을 호소하며 외친 구호가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Deus vult)"**였다.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서 되찾자는 이 1차 십자군은,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함락하며 절정에 이르렀다.

함락 후 벌어진 일은 십자군 자신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한 종군 성직자(아길레르의 레몽)는 "말을 탄 사람의 무릎까지 피가 찼다"고 적었다 — 이는 명백한 과장이지만, 그 과장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의 정신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이 피신한 회당은 불태워졌다. 사망자는 수천에서 (당대 과장된 기록으로) 수만까지 이르나, 현대 학계는 도시 인구 규모로 볼 때 이를 크게 할인한다.

집에서 시작된 학살 — 라인란트 포그롬

주목할 것은, 십자군의 첫 희생자가 중동의 무슬림이 아니라 유럽의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1096년 1차 십자군의 일부 무리는 성지로 떠나기도 전에 라인란트(보름스·마인츠·쾰른 등)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해 수천 명을 학살했다. "먼 곳의 그리스도의 적을 치러 가면서, 가까운 곳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을 왜 살려두는가"라는 논리였다. 이 라인란트 학살은 유럽 반유대주의 폭력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꼽히며, 850년 뒤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긴 박해사의 한 출발점이 됐다.

같은 기독교인을 향한 칼 — 4차 십자군

십자군의 논리가 얼마나 쉽게 폭주하는지는 **4차 십자군(1204)**이 보여준다. 성지로 가야 할 십자군이 방향을 틀어, 같은 기독교(정교회)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사흘간 약탈·학살했다. 비잔틴 제국의 심장이 서방 기독교도의 손에 무너진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이교도를 치자던 칼이 같은 신앙의 형제를 향한 것이다.


2부. 알비 십자군 — 기독교가 기독교를 절멸시키다

십자군의 칼끝이 유럽 내부의 "이단"을 겨눈 가장 참혹한 사례가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 1209~1229)**이다.

카타리파와 베지에의 학살

남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에는 가톨릭 교리와 다른 이원론을 믿는 **카타리파(알비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120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들을 절멸시키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 같은 기독교인을 상대로 한 최초의 십자군이었다.

1209년 7월, 십자군은 베지에(Béziers) 시를 포위했다. 이 도시에는 카타리파와 가톨릭 신자가 섞여 살고 있었다. 누가 이단이고 누가 정통인지 어떻게 가려낼 것이냐는 물음에, 교황 특사이자 시토회 수도원장이던 아르노 아말리크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

"모두 죽여라. 신께서 그분의 사람을 가려내실 것이다(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이 말이 실제 발언인지는 사료상 논쟁이 있다(이를 전한 것은 수십 년 뒤 독일 수도사 카이사리우스의 기록이다). 그러나 발언의 진위와 무관하게, 그날 베지에에서 벌어진 일은 명백하다. 도시 주민 상당수가 — 가톨릭 신자까지 포함해 — 무차별 학살됐다. 당대 기록은 "7,000명이 교회 안에서 죽었다"거나 "2만 명이 죽었다"고 전하지만, 이는 중세 사료 특유의 과장으로, 현대 학계는 도시 인구 자체가 1만~1만 5,000명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수천 명 규모로 본다. 아말리크 자신은 교황에게 "2만 명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절멸의 완성과 종교재판의 탄생

알비 십자군은 20년간 이어지며 랑그도크의 카타리파를 사실상 절멸시켰다. 전쟁·학살·기근으로 인한 이 지역 전체의 인명 손실은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나 편차가 크다. 그리고 이 십자군이 남긴 가장 긴 그림자는 숫자가 아니다. 살아남은 이단을 색출하기 위해 교황청이 만든 상설 기구 — 종교재판소(Inquisition) — 가 바로 여기서 제도화됐다.


2.5부. 타 종교를 향한 칼 — 이교도·유대인·무슬림

알비 십자군이 "이단(기독교 내부의 다른 교리)"을 겨눴다면, 그 칼끝은 기독교 바깥의 종교들 — 유럽 토착 다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 도 함께 겨눴다. 개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한 영역이다.

이교(異敎)의 절멸 — "개종하지 않으면 죽는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4세기 이후, 한때 박해받던 종교가 이제 박해하는 종교가 됐다. 그리스·로마의 다신교 신전이 파괴되고 제의가 금지됐다. 391년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움(세라피스 신전)**이 기독교도 군중에게 파괴됐고, 415년에는 여성 수학자·철학자 **히파티아(Hypatia)**가 기독교 광신도 무리에게 잔혹하게 살해됐다 — 이교 지식의 상징이 린치당한 사건으로 오래 기억된다.

더 조직적인 것은 유럽 북부 이교도에 대한 강제 개종 전쟁이었다. 782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는 색슨족 정복 전쟁 중 베르덴(Verden)에서 이교 색슨 포로 약 4,500명을 하루에 참수한 것으로 전해진다(이 숫자의 진위에는 논쟁이 있으나, 대량 처형 자체는 사료가 전한다). 샤를마뉴가 반포한 색슨 법령은 세례를 거부하거나 이교 제의를 지키는 자, 화장(火葬) 풍습을 따르는 자를 사형에 처했다. "개종하거나 죽거나"가 문자 그대로 법이었다.

이 논리는 중세 내내 이어졌다. 12~13세기 **북방 십자군(Northern Crusades)**은 발트해 연안의 프로이센인·리투아니아인·슬라브계 이교도를 상대로 벌어졌다.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럽 이웃을 상대로 한 이 십자군에서, 저항하는 이교 부족은 학살되거나 강제 개종당했고, 고(古)프로이센인은 사실상 민족 자체가 소멸했다.

유대인 — 1,000년에 걸친 박해의 사슬

유럽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화된 1,000년의 사슬이었다. 1부에서 본 1096년 라인란트 학살은 그 시작의 한 장면일 뿐이다.

이 긴 박해사가 근대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대인 박해는 기독교 세계의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종교 폭력이다.

무슬림 — 레콘키스타와 추방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레콘키스타(국토회복운동) 과정에서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완성된 이 과정 이후, 애초의 종교 자유 약속은 곧 뒤집혔다. 무슬림은 강제 개종(이들이 '모리스코')당하거나 추방됐고, 3부에서 볼 종교재판의 표적이 됐다. 지중해 건너편에서도 십자군의 성지 원정은 이슬람 도시들에 대한 반복적 학살을 남겼다.

세 종교에 대한 박해를 관통하는 논리는 하나다. "유일한 참된 신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다른 신을 믿는 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오류가 된다. 그리고 권력이 그 전제를 집행할 때, 후자가 된다.


3부. 종교재판 — 과장과 축소 사이에서

종교재판만큼 숫자가 정치적으로 다뤄진 주제도 드물다. 반가톨릭 선전은 수백만 명을 말하고, 호교론은 "거의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둘 다 사실이 아니다.

'검은 전설'과 그 교정

특히 **스페인 종교재판(1478~1834)**은 개신교권의 '검은 전설(Leyenda Negra)' 속에서 수백만 명을 고문·화형한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종교재판소 자체의 방대한 기록을 분석한 실증 연구(구스타브 헤닝센 등)는 이 그림을 크게 수정했다.

즉 "수백만 명"은 명백한 신화다. 처형 비율로만 보면 당시 세속 법정보다 오히려 낮았다는 평가도 있다. 이 연재의 원칙대로, 우리는 이 축소 쪽 교정을 정직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축소가 면죄는 아니다

동시에, 숫자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이 종교재판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몇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처형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15만 건의 심문 각각은 고문, 재산 몰수, 공개 모욕(아우토다페auto-da-fé), 사회적 매장을 동반했다. 죽이지 않아도 삶을 파괴하는 체계였다.

둘째, 표적 집단이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강제로 개종한 유대인(콘베르소)과 무슬림(모리스코)이 "비밀리에 옛 신앙을 유지한다"는 혐의로 집중 겨냥됐다. 1492년 유대인 추방령으로 수십만 명이 재산을 잃고 쫓겨났고, 1609~1614년 모리스코 약 30만 명이 추방됐다. 화형당하지 않았을 뿐, 공동체 전체가 지워졌다.

셋째, 공포의 일상화다. 밀고가 장려되고, 피고는 고발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했다. 7편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본 "증명되어야 하는 무죄"의 구조가, 400년 앞서 여기 있었다.


4부. 마녀사냥 — "900만 명"이라는 신화와 실제

숫자부터 바로잡는다

마녀사냥만큼 거짓 숫자가 끈질기게 떠도는 주제도 없다. 20세기 일부 저술과 대중문화는 유럽에서 "900만 명의 마녀가 화형당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숫자는 18세기 한 독일 저술가(고트프리트 포이크트)의 근거 없는 추정에서 비롯된 완전한 허구다.

현대 역사학계가 재판 기록을 집계한 결과는 전혀 다르다. 약 1400~1750년 유럽 전역에서,

으로 추정된다. 90만도, 900만도 아니다. 그러나 — 다시 강조하지만 — 4만~6만 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가난한 여성, 과부, 노파, 산파, 공동체의 주변부에 있던 약자들이었다.

누가, 왜 죽였나

주목할 점은 마녀사냥의 지리와 시기다. 가장 극심했던 곳은 교황청이 강력했던 이탈리아·스페인이 아니라,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충돌하며 종교적 불안이 극에 달했던 독일어권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모두 마녀를 불태웠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밤베르크에서는 1620~30년대에 각각 수백~수천 명이 처형됐다.

마녀사냥이 종교적 광기만의 산물은 아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소빙기(1편에서 본 그 소빙기)의 흉작, 역병,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누군가 저주를 걸었다"는 희생양 찾기로 분출된 것이다. 재산 몰수를 노린 고발, 이웃 간의 원한도 작용했다. 종교는 이 집단 히스테리에 "악마와 계약한 마녀"라는 신학적 틀과 처형의 정당성을 제공했다. 신학적 확신과 사회적 공포가 결합했을 때 가장 약한 자들이 불타 죽었다.


5부. 30년 전쟁 — 신앙의 이름으로 유럽을 불태우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진 땅

기독교 분파 간 폭력의 정점은 **30년 전쟁(1618~1648)**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루터파·칼뱅파)의 대립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주로 오늘날의 독일)을 초토화했다.

전쟁·기근·역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450만~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독일어권 일부 지역은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이 사라졌다. 비율로만 따지면, 독일 역사상 제1·2차 세계대전보다도 파괴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용병 부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약탈·강간·학살이 남았고(1631년 마그데부르크 약탈에서는 2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굶주린 피란민이 길에 넘쳤다.

역설적 결말 — 종교전쟁의 종말

그런데 30년 전쟁은 뜻밖의 유산을 남겼다. 신앙의 이름으로 유럽이 자멸하는 것을 목격한 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각 지역의 통치자가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하며 종교를 전쟁의 명분에서 분리하기 시작했다. 근대 주권국가 체제와 (제한적이나마) 종교적 관용의 싹이 이 폐허 위에서 돋아났다. 신앙의 이름으로 흘린 피가 역설적으로 "신앙을 이유로 죽이지 말자"는 합의를 낳은 것이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30년 전쟁 이전, 프랑스에서도 가톨릭과 위그노(칼뱅파 개신교)의 종교전쟁이 격렬했다. 그 상징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이다.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왕실이 묵인·주도한 가운데 가톨릭 군중이 위그노를 학살했다. 파리에서만 수천 명, 지방으로 번진 학살까지 합치면 약 5,000~1만 명(일부 추정 3만 명)이 며칠 만에 살해됐다. 결혼식을 위해 파리에 모였던 위그노 지도부가 표적이 됐고, 시신이 센강을 메웠다.


6부. 선교라는 이름의 정복 — 다른 대륙으로 건너간 칼

지금까지는 유럽 '내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15세기 대항해시대 이후, 이 확신의 구조는 십자가와 함께 전 세계로 수출됐다. "이교도를 개종시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선교의 명분은, 많은 경우 식민 정복·강제 노동·문화 말살과 분리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수많은 선교사가 진심으로 원주민을 보호하려 했고(1편에서 본 라스 카사스가 대표적이다), 선교가 의료·교육·문자를 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 기구가 식민 권력과 한 몸이 되었을 때,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한 문화의 절멸 장치가 됐다. 대륙별로 살핀다.

아메리카 — 선교소(Mission)라는 수용소

1편에서 다룬 아메리카 원주민 대멸종의 한 축이 바로 선교소 체계였다. 스페인은 정복지 곳곳에 선교소(misión)를 세워 원주민을 "개종"시키는 동시에 노동력으로 묶어뒀다.

가장 논쟁적인 사례가 캘리포니아 선교소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후니페로 세라(Junípero Serra)**가 1769년부터 세운 21개 선교소는, 겉으로는 복음화 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주민을 강제 수용·개종·노역시키는 체계였다. 일단 세례받은 원주민은 선교소를 떠날 수 없었고, 도망치면 병사들에게 붙잡혀 채찍질당했다. 과밀·강제 노동·유럽 전염병이 겹치면서, 선교소에 수용된 원주민 인구는 급감했다 — 일부 선교소에서는 사망률이 출생률을 크게 웃돌아, 수용 인구가 지속적으로 '보충'되어야 했다. 캘리포니아 원주민 인구는 선교소 시대와 뒤이은 골드러시(1편의 '캘리포니아 제노사이드')를 거치며 약 30만 명에서 수만 명으로 붕괴했다.

문제의 핵심은 세라에 대한 평가다. 가톨릭교회는 2015년 그를 성인(聖人)으로 시성했지만, 원주민 단체들은 그를 "제노사이드의 설계자"로 규탄하며 그의 동상을 무너뜨렸다. 이 연재의 원칙대로 균형을 지키자면, 세라 개인이 학살을 명령한 '인디언 킬러'였다는 일부 주장은 과장이다. 그는 당대의 신념에 따라 원주민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선의가 만든 체계 자체가 한 민족의 문화와 생명을 파괴했다는 사실은, 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는다.

아시아 — 고아 종교재판

유럽의 종교재판(3부)은 식민지로도 수출됐다. 포르투갈령 인도의 **고아 종교재판(1560~1812)**이 그것이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의 요청을 한 계기로 설치된 이 재판소는, 개종한 현지인(힌두교·이슬람교에서 가톨릭으로)이 몰래 옛 관습을 지키는지 감시하고 처벌했다. 힌두교 의식, 모국어 사용, 전통 복식까지 금지됐고, 250여 년간 수천 건의 재판과 수십~수백 건의 화형이 집행된 것으로 추정된다(기록 상당수가 폐기되어 정확한 수는 불명이다). 하비에르는 선교사로서 수많은 개종을 이끈 인물로 추앙받지만, 동시에 이 종교재판 설치를 촉구한 편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 한 인물 안의 두 얼굴이다.

1583년 고아 인근 쿤콜림에서는 힌두 사원을 파괴하려던 선교사 일행이 주민에게 살해되자, 포르투갈 당국이 보복으로 마을 지도자들을 학살한 쿤콜림 사건도 있었다.

오세아니아 — 선교소와 '빼앗긴 세대'

호주에서는 교회 선교소가 원주민 '동화 정책'의 핵심 집행 기관이 됐다. 19~20세기, 가톨릭·개신교 선교소들은 원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용했지만, 20세기 들어 이는 악명 높은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s)' 정책의 도구가 됐다. 정부와 교회가 협력해 원주민·혼혈 아동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내 선교소나 시설에서 백인 문화로 '교화'시켰다. 1910~1970년대에 원주민 아동의 약 10~33%가 가족과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와 문화의 세대 간 단절, 학대, 정체성 파괴가 그 결과였다. 2008년 호주 정부는 이에 공식 사과했다.

북미 — 원주민 기숙학교와 '표시 없는 무덤'

가장 최근까지 그 실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캐나다·미국의 원주민 기숙학교(Residential Schools)**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정부 예산으로 교회(주로 가톨릭·성공회)가 운영한 이 학교들은 원주민 아동을 가족에게서 분리해 "문명화"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설립자의 악명 높은 표어가 그 본질을 요약한다 — "인디언을 죽이고, 사람을 구하라(Kill the Indian, Save the Man)."

아이들은 모국어 사용이 금지되어 적발되면 매를 맞았고, 전통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으며, 영양실조·질병·신체적·성적 학대가 만연했다.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TRC)'는 2015년 이를 **"문화적 제노사이드(cultural genocide)"**로 규정했다. 사망 아동 수는 공식 확인만 약 3,200명, 실제로는 4,000~6,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021년, 캐나다 캄루프스의 옛 기숙학교 부지에서 215구로 추정되는 표시 없는 아동 묘지가 지표 탐사로 발견되면서 세계가 충격에 빠졌고, 이후 다른 부지에서도 수백 기의 무표지 매장이 잇따라 확인됐다. 다만 여기서도 정직해야 한다. "대량 학살 무덤(mass grave)"이라는 표현이 일부 과장되어 쓰였다는 비판이 있고, 발굴을 통한 유해 확인은 대부분 진행 중이다. 지표 탐사 신호가 모두 매장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채 죽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이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TRC의 방대한 증언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다. 2022년 교황 프란치스코는 캐나다를 방문해 이 기숙학교 운영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통합 연표

연도

사건

추정 희생

391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움 파괴 (이교 신전)

—

415

히파티아 살해

—

782

베르덴 학살 — 샤를마뉴의 색슨 이교도 처형

(전승) 약 4,500명

1096

라인란트 학살 — 1차 십자군의 유대인 공동체 습격

수천 명

1099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학살

수천~(과장)수만

1147~1410

북방 십자군 — 발트 이교도 정복·개종

고프로이센인 소멸

1290

영국, 유대인 추방 (이후 프랑스·스페인 등 연쇄)

—

1348~1351

흑사병 포그롬 — 유대인 우물 독살설 학살

수만 명

1204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수천 명

1209

베지에 학살 (알비 십자군 개시)

수천 명 (사료 2만)

1209~1229

알비 십자군 — 카타리파 절멸

수십만 명(지역 전체)

1231~

교황청 종교재판소 제도화

—

1478

스페인 종교재판 시작

~350년간 처형 3,000~5,000

1492

스페인, 유대인 추방령

수십만 추방

1400~1750

유럽 마녀사냥

처형 약 4만~6만 명

1560~1812

고아 종교재판 (포르투갈령 인도)

수천 건 재판

1572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프랑스)

약 5,000~1만 명

1609~1614

스페인, 모리스코 약 30만 명 추방

—

1618~1648

30년 전쟁

약 450만~800만 명

1648

베스트팔렌 조약 — 종교전쟁의 종말

—

1769~

캘리포니아 선교소 체계 (세라)

원주민 인구 붕괴

1880s~1990s

캐나다·미국 원주민 기숙학교

사망 아동 4,000~6,000+

1910~1970s

호주 '빼앗긴 세대'

아동 10~33% 분리

2015

캐나다 TRC, 기숙학교를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규정

—

2021

캄루프스 등 기숙학교 무표지 아동 묘지 발견

—


결론: 확신이라는 이름의 무기

이 편을 열며 "종교를 심판하는 글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제 그 뜻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 편이 다룬 학살들의 진짜 가해자는 '기독교'라는 신앙이 아니라, 신앙과 결합한 권력, 그리고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의 구조였다. 십자군을 선포한 것은 교황이라는 정치 권력이었고, 종교재판을 운영한 것은 왕권과 결탁한 제도였으며, 30년 전쟁을 벌인 것은 신앙을 명분 삼은 제후들이었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사람을 불태운 것이 아니다.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사람을 불태웠다.

이교 신전을 부수고, 유대인을 게토에 가두고, 무슬림을 추방하고, "마녀"를 불태운 그 모든 사건의 밑바닥에는 같은 전제가 있었다 — "오직 하나의 참된 신앙만이 있고, 그 바깥은 구원받거나 제거되어야 한다." 신앙 자체는 죄가 없다. 그러나 그 신앙이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가 되고 권력의 칼을 쥐었을 때, 다른 신을 믿는 이들은 영혼이 아니라 표적이 됐다.

그래서 이 편은 7편(스탈린)과 거울처럼 마주 본다. 스탈린의 "역사의 진보"든 중세의 "신의 뜻"이든, 구조는 동일하다.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 + 그것을 집행할 권력 + 반대자의 비인간화. 이 세 가지가 모이면, 세속이든 종교든 똑같이 사람을 학살한다. 20세기의 무신론 국가(스탈린·마오)가 종교 못지않은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문제가 "신을 믿느냐"가 아니라 "의심을 허용하느냐"에 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이 편은 숫자의 정직성이라는 이 연재의 원칙을 가장 날카롭게 시험했다. 반종교 진영의 과장("종교재판 수백만, 마녀 900만")과 호교론 진영의 축소("거의 안 죽었다")가 충돌하는 이 영역에서, 우리는 양쪽을 모두 거부하고 실증을 택했다. 마녀 4만~6만 명, 스페인 종교재판 처형 3,000~5,000명 — 신화보다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숫자들이다. 과장은 희생을 선정적 구경거리로 만들고, 축소는 희생자를 두 번 죽인다. 정직한 기억은 그 사이에 있다.

그리고 6부에서 보았듯, 이 확신의 구조는 유럽 안에 머물지 않았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아메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로 건너간 그것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명분 아래 한 대륙의 언어와 문화와 아이들을 지웠다. 캘리포니아 선교소에서 캐나다 기숙학교의 표시 없는 무덤까지 — 선의를 품은 개인들이 운영했을지라도, 그 체계가 다른 민족을 "교화되어야 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비인간화 기계가 됐다. "인디언을 죽이고 사람을 구하라"는 표어는,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문화 말살의 언어로 뒤집히는지를 소름 끼치게 요약한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단서도 기록해두자. 30년 전쟁의 폐허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이 태어났듯, 기독교 세계는 스스로의 피를 보고 종교적 관용과 정교분리라는 교훈을 — 느리고 불완전하게 — 배워나갔다. 오늘날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가장 강하게 옹호하는 목소리 중에도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이들이 많다. 같은 신앙이 학살의 명분도, 그 학살에 맞서는 양심의 근거도 될 수 있었다는 이 양면성이야말로, "종교 자체가 문제"라는 단순한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제는 언제나 같다. 인간이 자신의 확신을 의심할 수 없는 절대로 만들고, 그 확신에 칼을 쥐여줄 때 — 그 칼이 십자가를 들었든 붉은 깃발을 들었든 — 피가 흐른다.


참고한 주요 자료

본문의 사망자 수치는 모두 추정치입니다. 이 주제는 특히 반종교적 과장(종교재판 수백만, 마녀 900만)과 호교론적 축소가 충돌하는 영역이라, 양쪽을 모두 경계하고 현대 실증 연구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 글은 특정 종교나 신앙을 규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확신이 권력과 결합했을 때의 위험을 역사적으로 살피려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