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 발을 들이기 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약 6,000만 명이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150년 남짓, 원주민 인구의 약 90%인 5,500만 명이 사라졌다. 학계는 이 전대미문의 인구 붕괴를 **"그레이트 다잉(The Great Dying)"**이라 부른다.
이 숫자는 감상적 과장이 아니다. 2019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알렉산더 코크 연구팀이 『4차기 과학 리뷰(Quaternary Science Reviews)』에 발표한 연구는, 카리브해·멕시코·중앙아메리카·잉카 영역 등 아메리카 7개 지역의 인구·토지 이용 증거를 종합해 접촉 이전 인구를 약 6,000만 명, 1600년경 생존자를 약 600만 명으로 산정했다. 즉 한 세기 만에 인구의 약 90%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특히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 이야기는 뒤(3장)에서 다룬다.
사망 원인의 80~90%는 구대륙에서 넘어온 낯선 전염병 —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티푸스 등 — 이었다. 구대륙과 수천 년간 격리되어 살아온 원주민에게는 이 병원체들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참사를 "면역력 부족으로 인한 자연재해"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이면에 조직적 학살, 가혹한 강제 노동, 철저한 토지 박탈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편에서는 앞서 요약했던 연표의 다섯 국면을 각각 하나의 소주제로 삼아, 그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사망 원인의 80~90%는 천연두·홍역·티푸스·인플루엔자 등 외래 전염병이었다. 구대륙과 수천 년간 격리되어 살아온 원주민에게는 이 병원체들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전염병 때문이었으니 학살이 아니다"라는 서술은 절반의 진실이다. 전염병으로 붕괴한 사회 위에 다음이 겹쳐졌다.

시기 | 국면 | 핵심 사건 | 주된 사망 원인 |
|---|---|---|---|
1492~1493 | 착취의 서막 | 콜럼버스 도착, 히스파니올라 식민화, 타이노족 절멸 | 강제 노역 + 천연두 |
1519~1521 | 아스테카 붕괴 | 코르테스 침입, 1520년 천연두 대유행, 테노치티틀란 함락 | 천연두 |
1532~1533 | 잉카 붕괴 | 천연두 선(先) 전파 → 왕위 내전 → 피사로 정복 | 천연두 + 내전 |
1545 · 1576 | 역병과 은광 | 코콜리츨리 2차례 대유행(파라티푸스 C 유력), 포토시 은광 미타 노역 | 장열 + 강제 노동 |
1600년경 | 기후 변화 | 인구 10%로 붕괴 → 농경지 삼림화 → CO₂ 하락 → 소빙기 심화 | (인구 붕괴의 지구적 결과) |
1830 | 이주법 | 인디언 이주법 제정(잭슨) | (제도적 토지 박탈의 시작) |
1838~1839 | 눈물의 길 | 체로키 강제 이주, 약 4,000명 사망 | 혹한·기아·질병 |
1846~1873 | 캘리포니아 제노사이드 | 주 정부 후원 원주민 사냥, 9,000~16,000명 살해 | 조직적 학살 |
1890 | 운디드니 | 제7기병연대의 라코타족 200~300명+ 학살 | 조직적 학살 |
1990 · 2019 · 2024~2026 | 기억의 투쟁 | 의회 유감 결의(1990) / 캘리포니아 제노사이드 인정(2019) / 운디드니 훈장 유지 결정(2025) | — |
1492년 10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한 섬(현 바하마 일대)에 상륙하며 두 대륙의 운명적 '접촉'이 시작됐다. 이듬해인 1493년부터 스페인은 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자리한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을 본격적으로 식민화했다.
이 섬에 살던 원주민이 카리브해의 **타이노족(Taíno)**이다. 접촉 당시 히스파니올라의 타이노 인구 추정치는 학자에 따라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까지 크게 갈리지만, 이 논쟁의 결과가 무의미할 정도로 결말은 참혹했다. 반세기가 지나기 전에 타이노족은 사실상 절멸했다.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정복자들에게 히스파니올라는 무엇보다 황금의 땅이어야 했다. 원주민에게는 일정량의 사금(砂金)을 정기적으로 바치도록 강제하는 공납 제도가 부과됐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신체를 훼손하는 처벌이 뒤따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곧이어 스페인이 아메리카 전역에 이식하게 되는 착취 제도의 원형인 **엔코미엔다(encomienda)**가 자리 잡았다. 명목상으로는 정복자(엔코멘데로)가 원주민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대가로 그들의 노동력을 '위탁'받는 제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 노역 체제였다. 여기에 황금을 캐기 위한 가혹한 노동과 유럽에서 묻어온 질병(특히 천연두)이 겹치면서 타이노 사회는 급속히 붕괴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고발한 사람이 도미니코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다. 한때 엔코멘데로였다가 참회하고 원주민 권익 옹호자로 돌아선 그는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1552)에서 학살과 착취의 실상을 신랄하게 증언했다. 물론 그의 서술에도 과장이 섞여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카리브해 원주민 사회가 반세기 만에 사라졌다는 큰 그림 자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핵심: 대멸종의 첫 무대는 대량 학살이 아니라 '착취 + 질병'의 복합이었다. 정복 전쟁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공납·강제 노역·전염병만으로 카리브해의 한 민족 전체가 지워졌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는 콜럼버스 일행의 모습을 그린 상상도. 출처: Bettmann / Bettmann Archive
이 시기, 중남미를 호령하던 두 거대 제국이 스페인 정복자(콩키스타도르)와 전염병의 협공에 무너졌다. 주목할 점은, 결정타를 날린 것이 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체였다는 사실이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수백 명의 병력으로 멕시코 중부의 아스테카 제국에 침입했다. 인구 수십만의 거대 도시 테노치티틀란(오늘날 멕시코시티)을 어떻게 이 소규모 병력이 함락시킬 수 있었을까. 답의 상당 부분은 1520년에 창궐한 천연두에 있다.
코르테스 일행을 진압하러 온 스페인 원정대의 한 병사가 옮긴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두는, 면역이 전혀 없던 아스테카인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번졌다. 도시 인구가 급감했고, 방어를 지휘할 지도부와 병력마저 병으로 쓰러졌다. 코르테스가 원주민 동맹 세력(틀락스칼텍 등 아스테카의 지배에 반발하던 부족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과 더불어, 이 전염병이 1521년 테노치티틀란 함락의 결정적 배경이 됐다.
안데스의 잉카 제국은 더 극적이다.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도착했을 때, 잉카는 이미 피사로가 오기도 전에 무너져 있었다. 천연두가 파나마 지협을 넘어 무역로를 타고 잉카 영토까지 먼저 전파됐던 것이다.
이 전염병으로 잉카 황제 **우아이나 카팍(Huayna Cápac)**과 그가 지명한 후계자가 잇달아 사망했고, 이는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두 이복형제 사이의 격렬한 왕위 계승 내전으로 이어졌다. 제국이 내전으로 사분오열된 바로 그 순간에 피사로의 소규모 병력이 들이닥친 것이다. 피사로는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막대한 금·은을 몸값으로 받아낸 뒤 그를 처형했고, 잉카는 급속히 무너졌다.
핵심: 두 제국 모두 "우월한 유럽 문명이 미개한 원주민을 정복했다"는 서사로 오래 포장돼 왔지만, 실상은 전염병이 사회를 먼저 붕괴시킨 폐허 위에서 정복이 완성된 것에 가깝다. 병원체가 정복의 최전선 무기였다.
번성했던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역사적 일러스트. 출처: WilshireImages / Getty Images
천연두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재앙은 끝나지 않았다. 1545년과 1576년, 멕시코 지역에서 나우아어로 "역병(疫病)"을 뜻하는 **코콜리츨리(cocoliztli)**가 두 차례 대유행했다. 고열, 극심한 출혈, 검은 혀, 눈·코·입의 출혈을 동반하는 이 병은 감염자를 며칠 만에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 두 차례 유행이 남긴 인명 피해는 압도적이었다. 1545~1548년의 1차 유행에서만 500만~1,500만 명, 1576년의 2차 유행에서 200만~2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두 사건을 합치면 뉴스페인 원주민 인구의 상당 부분이 소멸했다. 지역에 따라 원주민의 최대 80%가 사망했다는 추산도 있다.
코콜리츨리가 정확히 무슨 병이었는지는 500년 가까이 미제로 남아 있었다. 천연두·홍역·발진티푸스·바이러스성 출혈열 등이 후보로 거론됐다. 그런데 2018년,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하버드대·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의 국제 연구팀이 결정적 단서를 내놓았다.
연구팀은 오아하카주 **테포스콜룰라-유쿤다아(Teposcolula-Yucundaa)**의 코콜리츨리 시기 집단 묘지에서 발굴된 유골 29구의 치아에서 고대 DNA를 추출했다. 그리고 그중 10구에서 장티푸스와 유사한 **장열(腸熱, enteric fever)**을 일으키는 세균 **살모넬라 엔테리카 파라티푸스 C(Salmonella enterica Paratyphi C)**의 유전 물질을 검출했다. 『네이처 생태·진화』에 발표된 이 연구는, 코콜리츨리의 유력한 원인균에 대한 최초의 분자생물학적 증거였다. (연구팀은 다른 병원체가 함께 유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균 역시 유럽인이 들여왔을 가능성이 높은 '외래' 병원체라는 것이다. 즉 코콜리츨리 또한 넓은 의미의 그레이트 다잉의 일부였던 셈이다.
전염병만이 아니었다. 1545년, 현재의 볼리비아 지역에서 포토시(Potosí) 은광이 발견됐다.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한 이 은광은 스페인 제국의 부를 떠받쳤지만, 그 부는 원주민의 목숨을 연료로 삼았다.
스페인은 잉카 제국의 전통적 부역 제도였던 **미타(mita)**를 악용해 광범위한 지역의 원주민 성인 남성을 순번제로 징발했다. 이들은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갱도 깊숙이 내려가 수은 중독과 낙반, 과로에 노출된 채 은을 캤다. 전염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조차 어두운 갱도에서 소모품처럼 스러져 갔다. 포토시는 훗날 "사람을 잡아먹는 산"으로 불리게 된다.
핵심: 이 국면은 '외래 질병'과 '강제 노동'이 어떻게 서로를 증폭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병에서 살아남으면 광산이 기다렸고, 광산에서 인구가 줄면 남은 이들의 부역 부담이 더 무거워지는 악순환이었다.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뒤흔든 역병 중에서도 코콜리츨리(Cocoliztli)는 수백 년 동안 과학자와 역사학자들을 괴롭힌 거대한 수수께끼였습니다. 아즈텍 언어인 나우아틀어(Nahuatl)로 '해충' 또는 '역병'을 뜻하는 이 질병은, 1545년과 1576년 두 차례의 대유행을 통해 당시 멕시코 인구의 무려 80%에 달하는 500만~1,500만 명을 몰살시켰습니다.
당시 기록된 증상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만큼 참혹했습니다.
당시 역사를 기록한 생존자들과 스페인 의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코콜리츨리에 걸린 환자들은 다음과 같은 끔찍한 증상을 겪으며 발병 후 보통 3~4일 만에 사망했습니다.
극심한 고열과 두통: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과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시작됩니다.
전신 출혈: 이 병의 가장 두려운 특징으로, 환자의 코와 입, 눈, 귀 등 온갖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신체 변색: 심한 황달로 피부와 눈이 노랗게 변했고, 설사가 이어졌으며, 혀는 새까맣게 타들어 가며 말라붙었습니다.
의식 착란: 극심한 갈증 속에 헛소리를 하거나 정신을 잃는 증상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학계에서는 이 병을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혹은 쥐가 옮기는 유행성 출혈열일 것이라 추측해 왔지만, 그 어떤 질병도 이 기괴하고 치명적인 증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 오랜 미스터리는 2018년, 독일 맥스플랑크 인류사 과학연구소(Max Planck Institute)의 최첨단 고고학 유전자 분석 기술 덕분에 마침내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연구진은 멕시코 오아하카(Oaxaca) 지역의 코콜리츨리 희생자 집단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들의 치아 안쪽에서 고대 DNA(aDNA)를 추출해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즈텍을 무너뜨린 진짜 범인의 정체를 밝혀냈습니다.
진짜 범인의 정체: 살모넬라 엔테리카 파라티피 C (Salmonella enterica Paratyphi C)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식중독균의 일종이자, 치명적인 전신 감염증인 '파라장티푸스(Paratyphoid fever)'를 일으키는 박테리아입니다. 적절한 항생제나 수액 치료가 없던 과거에는 방치할 경우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질병이었습니다.
이 박테리아는 오직 인간의 배설물이나 오염된 물을 통해서만 전파되며,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할 때 함께 묻혀 들어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늘날의 장티푸스나 파라장티푸스 증상과 비교해 볼 때, 당시 원주민들이 겪은 '전신 출혈'과 '80%에 달하는 치사율'은 이례적으로 잔혹했습니다. 역사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여기에는 세 가지 비극적인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구대륙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가축을 키우고 밀집 생활을 하며 살모넬라균을 비롯한 수많은 수인성 박테리아에 노출되어 미약하게나마 면역력을 키워왔습니다. 반면, 이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이 균에 대항할 면역 체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는 그저 "가벼운 열병"이나 "무증상 잠복"에 그쳤던 균이, 원주민들에게는 장기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극물로 작용한 것입니다.
살모넬라균은 주로 오염된 배설물이나 물, 음식을 통해 전파됩니다. 스페인의 침략과 정복 과정에서 아즈텍의 정교한 수로와 배수 시스템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가혹한 강제 노역과 수탈로 원주민들의 영양 상태는 최악이었고, 위생이 완전히 붕괴된 환경에서 살모넬라균은 식수를 타고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나이테 분석 결과, 16세기 멕시코는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대가뭄을 겪고 있었습니다. 가뭄이 심해지자 깨끗한 물이 부족해진 원주민들은 오염된 고인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살모넬라균의 밀도를 극도로 높였습니다. 가뭄 끝에 간헐적으로 쏟아진 폭우는 오염된 배설물과 박테리아를 온 사방의 우물과 강으로 씻어 내리며 확산 속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코콜리츨리는 단순히 "운이 나빠 발병한 전염병"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 건너온 낯선 병원균(살모넬라 파라티피 C)이, 정복 전쟁으로 무너진 위생 환경, 그리고 최악의 가뭄이라는 자연재해와 결합하여 한 문명을 완전히 지워버린 인류사 최악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었던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 코크 팀의 2019년 연구가 유명해진 진짜 이유가 여기 있다. 1600년경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가 접촉 이전의 약 10% 수준으로 떨어지자, 경작되던 농경지 약 5,600만 헥타르(프랑스 국토와 비슷한 면적)가 방치돼 숲으로 되돌아갔다. 되살아난 초목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대량 흡수하면서, CO₂ 농도가 7~10ppm 낮아졌고 이것이 지구 평균 기온을 약 0.15℃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 냉각은 14~19세기의 한랭기인 **소빙기(Little Ice Age)**를 심화시킨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소빙기의 주원인은 화산 활동과 태양 활동 변동이지만, 연구팀은 그 냉각을 '완성'하는 데 원주민 대멸종에 따른 CO₂ 감소가 기여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구 참사가 지구의 대기 조성까지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 인간이 초래한 초기 기후 변화의 섬뜩한 사례다.
19세기, 무대가 북아메리카로 옮겨가며 비극의 양상도 바뀐다. 전염병과 정복의 시대에서, 국가가 법으로 집행하는 조직적 영토 박탈의 시대로.
미국 남동부에는 체로키, 촉토, 치카소, 크리크, 세미놀 등 이른바 "다섯 문명 부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정착 농경과 문자 체계(세쿼이아가 고안한 체로키 음절문자)까지 갖춘 사회였다. 그러나 그들의 비옥한 땅, 특히 조지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백인 정착민의 토지 욕구가 폭발했다.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서명했다. 미시시피강 동쪽의 원주민을 강 서쪽의 척박한 '인디언 준주'(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일대)로 이주시키는 법이었다. 체로키족은 이에 맞서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을 벌였고, 대법원은 체로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우스터 대 조지아, 1832)을 내렸지만 — 잭슨 행정부는 이 판결을 사실상 무시했다.
강제 이주는 부족별로 순차 집행됐고, 그 절정이 1838~1839년 체로키족의 이주였다. 총검을 든 군대에 의해 집에서 내몰린 체로키 사람들은 수용소에 억류됐다가, 한겨울에 1,000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서부로 이송됐다. 굶주림, 혹한, 발진티푸스·이질 등 질병이 행렬을 덮쳤다.
체로키어로 이 여정은 **"우리가 울었던 길(Nunna daul Tsuny)"**로 불렸고, 영어로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새겨졌다. 이주에 나선 약 1만 6,000명의 체로키인 가운데 4,000명 안팎이 길 위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 부족 전체로 보면 이주 과정의 사망자는 훨씬 더 많았다.
핵심: 이 국면의 죽음은 병원체가 아니라 입법·행정·군대라는 국가 기구가 만들어낸 것이다. 대법원 판결조차 무력화한 강제 이주는, 대멸종이 '자연현상'이 아니라 '정책'이었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강제 이주의 비극을 기록한 '눈물의 길' 역사 표지판. 출처: chapin31 / Getty Images
TRAIL OF TEARS (Continued from other side)
In June 1838 the first three detachments of Cherokee captured by the Georgia Guard were forced to depart from Ross’s Landing, Tennessee. Because of the high casualties of these first groups, permission was given to delay the removal of the other groups until fall when it would be cooler. Also, the Cherokee leaders petitioned General Scott that they be allowed to conduct their own removal. Permission was granted.
The remainder of the Cherokees began their trek west in the fall of 1838 in 13 detachments. After enduring an extremely severe winter, they arrived in the West in late winter and early spring of 1839. It has been estimated that from 2,000 to 4,000 of the 16,000 Cherokees died as a result of the forced removal.
The true story of the forced removal for the Cherokee people is one of survival. In spite of their hardships, they adapted and rebuilt their homes and government. Only 12 years after removal, the Cherokee Female Seminary opened on these grounds as the first public institution of higher learning for females west of the Mississippi River.
1838년 6월, 조지아 주 방위군에게 붙잡힌 체로키족의 첫 세 부대가 테네시 주 로스 랜딩에서 강제로 출발해야 했다. 이 첫 그룹들의 높은 사상자 때문에, 다른 그룹들의 강제 이주는 날씨가 더 서늘해지는 가을까지 지연하라는 허가가 내려졌다. 또한 체로키 지도자들은 스콧 장군에게 자신들이 스스로 이주를 진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였고, 허가가 내려졌다.
나머지 체로키족은 1838년 가을 13개의 부대로 나뉘어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극도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후, 그들은 1839년 늦은 겨울과 초봄에 서부에 도착했다. 추정에 따르면, 16,000명의 체로키족 중 2,000명에서 4,000명이 이 강제 이주 과정에서 사망했다.
체로키족의 강제 이주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응하여 가정과 정부를 재건했다. 강제 이주 후 불과 12년 만에, 체로키 여자 신학교(Cherokee Female Seminary)가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여성들을 위한 최초의 공립 고등 교육 기관으로 이 땅에 문을 열었다.
마지막 국면은 은유가 필요 없는, 명백한 **집단 학살(genocide)**이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전 세계에서 개척자들이 몰려들었다(골드러시). 원주민의 땅과 자원은 이들의 이익과 정면충돌했고, 그 결과는 조직적 살육이었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이 학살이 주(州)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후원됐다는 사실이다. 초대 주지사 피터 버넷은 1851년 "인디언 인종이 절멸할 때까지 절멸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공언했고, 캘리포니아주는 원주민을 사냥하는 민병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그 비용을 연방 정부가 사후 보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사실상 학살에 재정이 투입된 것이다. 이 기간에만 9,000명에서 1만 6,000명의 원주민이 직접 살해됐고, 질병·기아·노예화까지 포함하면 캘리포니아 원주민 인구는 약 15만 명에서 3만 명 이하로 급감했다.
캘리포니아주는 무려 168년이 지난 2019년에야 개빈 뉴섬 주지사가 이를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1890년 12월 29일, 사우스다코타주 파인리지 보호구역의 운디드니(Wounded Knee) 냇가. 미 제7기병연대가 라코타 수족 무리를 포위하고 무장 해제하는 과정에서 총성이 울렸고 —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대체로 무장 해제 중 우발적 발포로 시작됐다고 본다 — 병사들이 비무장 상태의 남녀노소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라코타 사망자는 200명에서 3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상당수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망치던 임신부와 아기를 안은 여성들까지 사살됐다. 군은 시신을 며칠간 얼어붙게 방치했다가 집단 매장했다. 이 참극은 200년 넘게 이어진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의 상징적 종막으로 역사에 새겨졌다.
운디드니는 과거의 사건으로 봉인되지 않았다. 미군은 이 학살에 가담한 병사 20명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고, 원주민 사회는 수십 년간 이 훈장의 철회를 요구해 왔다.
1990년, 학살 100주년을 맞아 미국 연방의회는 운디드니에 대한 공식 "깊은 유감(deep regret)"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훈장은 건드리지 않았다.
2024년 7월,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이 20개 훈장을 재검토하는 5인 패널을 설치했다. "당시 기준으로도 비전투원 공격·항복자 살해 등 훈장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가 없었는지" 심사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2025년 9월,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재검토 패널의 판단을 근거로 훈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최종 발표했다. 라코타 부족들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은 강하게 반발했고, 스탠딩록 수족 의장 재닛 알카이어는 "그날의 진실은 헤그세스가 다시 쓸 수 없다"고 비판했다.
2026년 현재까지도 유족과 부족들은 훈장 철회 운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상원 군사위원회는 국방부에 검토 자료 공개를 요구하는 등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핵심: 이 국면은 "면역력 없는 원주민에게 병이 퍼졌을 뿐"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의도된 절멸의 기록이다. 그리고 명예훈장 논쟁이 보여주듯, 이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우스다코타주에 위치한 운디드니 학살 집단 매장지 안내판. 출처: Peter Davis / Getty Images
19세기 캘리포니아 골드러시(1848~1855년) 시기, 일확천금을 노린 이주민들이 몰려들면서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거대한 재앙을 맞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단순히 폭력을 방조한 수준을 넘어, 법을 제정하고 예산을 편성하여 조직적인 '원주민 사냥(Indian Hunting)'을 전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당시 주정부가 자행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역사적 사실들을 세 가지 핵심 구조로 나누어 설명해 드릴게요.
1850년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주로 정식 편입된 후, 초대 주지사로 선출된 피터 하드먼 버넷(Peter Hardeman Burnett)은 1851년 1월 7일 주 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참혹한 선언을 남깁니다.
"두 인종 사이에 시작된 절멸 전쟁은 인디언 종족이 멸종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리가 예상해야 할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파멸에 대해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 신의 섭리는 이 인종의 도태를 거스를 수 없는 선택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 피터 버넷, 캘리포니아 주지사 정기 연설 중
이 연설은 주정부가 앞으로 원주민을 대할 기본 기조가 '공존'이 아닌 '명시적 말살'임을 대내외에 공포한 순간이었습니다.
1851년 원주민 절멸 전쟁을 공식 선포한 피터 하드먼 버넷 주지사. 출처: Wikipedia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주정부는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원주민을 학살하도록 막대한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학살 자금 조달 (채권 발행): 1851년과 1852년,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원주민 토벌 작전에 참여한 민병대의 비용을 대기 위해 각각 50만 달러씩, 총 100만 달러가 넘는 주식 및 채권(인디언 전쟁 채권) 발행을 승인했습니다. 이는 당시 주정부 재정의 엄청난 비율이었습니다.
민병대 급여와 물자 지원: 민병대에 가입한 대원들에게는 하루 5달러가량의 급여(당시 기준 고액)와 무기, 식량이 국고로 지원되었습니다. 직업이 없던 이주민들에게 원주민 사냥은 일종의 '고수익 알바'가 되었습니다.
현상금(Bounty) 제도: 지방 정부와 주정부의 묵인 아래, 원주민을 죽였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가 성행했습니다. 1855년 샤스타(Shasta) 시에서는 원주민의 머리 하나당 5달러를 지급했고, 1863년 허니 레이크(Honey Lake) 부근에서는 머리가죽(Scalp) 하나당 25달러를 주기도 했습니다.
연방 정부의 사후 승인: 비극적이게도 미국 연방 정부(국회)는 1854년,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원주민 학살 민병대를 운영하며 쓴 비용 중 92만 달러 이상을 대리 변제해 주며 이 제노사이드를 사실상 추인했습니다.
주정부는 법률을 교묘하게 제정하여 원주민들이 백인들의 폭력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도록 손발을 묶었습니다. 대표적인 법이 1850년에 통과된 '인디언 정부 및 보호에 관한 법률(Act for the Government and Protection of Indians)'입니다. 제목은 '보호법'이지만 실상은 '합법적 노예화법'이었습니다.
사법권 박탈 (증언 금지): 이 법은 "어떤 백인도 인디언의 증언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다"고 명시했습니다. 즉, 백인이 원주민을 강간하거나 눈앞에서 가족을 살해해도, 원주민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었습니다. 백인 목격자가 원주민을 위해 증언해 주지 않는 한 백인을 처벌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합법적 아동 유괴와 강제 노동: 법에 따라 백인은 백인 부모가 없는 원주민 아동을 데려와 성인이 될 때까지 '도제(사실상의 노예)' 형태로 부릴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주민 마을을 습격해 어른들을 학살한 뒤, 아이들만 납치해 노예 시장에 파는 '유괴 비즈니스'가 주 전역에 판을 쳤습니다.
부랑자 체포 제도를 통한 노예화: 특별한 직업이 없는 원주민을 '부랑자'로 체포한 뒤, 재판을 통해 백인 지주들에게 노동력을 경매로 넘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기의 원주민 잔혹사는 무법천지에서 벌어진 민간인들 간의 우발적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법으로 원주민의 방어권을 완전히 빼앗고, 도지사가 말살을 명령했으며, 일반 시민들에게 국고로 '보조금'과 '현상금'을 쥐여주며 사냥을 독려한, 국가 주도의 철저한 제노사이드였습니다.
그 결과 1846년 약 15만 명에 달했던 캘리포니아 원주민 인구는 1873년경 겨우 3만 명 안팎으로 줄어들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문장이 있다. "사망 원인의 80~90%는 외래 전염병이었다." 이 사실 자체는 옳다. 그러나 이 문장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문제다.
대중적 역사 서술에서 "어쩔 수 없는 전염병 때문이었다"는 프레임은, 서구 열강의 정복과 학살에 면죄부를 주는 편리한 방패로 오랫동안 기능해 왔다. 병원체는 의도를 갖지 않으므로, 죽음의 책임을 병원체에 돌리면 가해자는 사라진다. "미개한 원주민이 면역이 없어서 죽었을 뿐"이라는 서사는, 그 죽음을 방치하고 이용하고 심지어 조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지운다. 이 마지막 소주제는 그 방패를 걷어내고, 전염병이 어떻게 정치적·심리적 무기, 나아가 물리적 무기로 동원되었는가를 살핀다.
먼저 정직하게 짚을 것이 있다. 의도성의 정도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16세기 정복 초기(코르테스·피사로)**에 유럽인들은 세균학도 면역학도 알지 못했다. 질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체가 아니라 '나쁜 공기(미아스마)'나 '신의 섭리'로 생긴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아스테카·잉카를 휩쓴 천연두 대유행은 '계획된 생물학전'이 아니라 무역과 접촉에 따른 우발적 참사에 가깝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 우연을 철저히 정치적·심리적 무기로 악용했다. 자신들은 멀쩡한데 원주민만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광경을 두고 "하느님이 우리 편을 들어 이교도를 벌하신다"고 선전하며 원주민의 전의를 꺾었다. 병의 원인은 몰랐지만, 병이 정복에 유리하다는 것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18~19세기 본격적 식민화기에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무렵이면 감염병이 접촉을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명확히 인지되고 있었다. 바로 이 인지 위에서, 전염병은 은유가 아닌 실제 무기로 등장한다.
전염병의 의도적 무기화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하고 문서로 입증된 사례가 1763년 포트 피트(Fort Pitt) 사건이다. 북미 원주민들이 영국의 영토 확장에 맞서 봉기한 '폰티악 전쟁(Pontiac's War)' 당시의 일이다.
당시 영국군 북미 총사령관 제프리 애머스트(Jeffery Amherst) 장군과 부하 헨리 부케(Henry Bouquet) 대령이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 있다. 1763년 7월, 애머스트는 부케에게 보낸 서신에서 "저 불온한 부족들에게 천연두를 퍼뜨릴 방도는 없겠는가? 우리는 이 기회에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책략을 써야 한다"는 취지로 적었다. 부케는 "담요를 이용해 감염시켜 보겠다, 다만 나 자신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취지로 답했다. (초안에 인용된 "7월 13일 부케 → 애머스트" 순서와 날짜는 사료상 부정확하다. 실제로는 애머스트가 먼저 제안하고 부케가 호응한 것으로, 이 논의는 편지 본문이 아니라 **추신(postscript)**에 은밀히 적혔다는 점이 오히려 의도의 은폐성을 시사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편지가 오가기 이전에 이미 현장에서 실행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포트 피트의 상인이자 민병대 지휘관이던 **윌리엄 트렌트(William Trent)**의 일지, 1763년 6월 24일(초안의 5월 24일은 오기)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호의의 표시로, 우리는 천연두 병동에서 가져온 담요 두 장과 손수건 한 장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것이 바라던 효과를 내기를 바란다."
협상하러 온 델라웨어족 대표들에게 천연두 환자용 담요를 '선물'로 위장해 건넨 것이다. 포트 피트 지휘관 시메온 에큐어(Simeon Ecuyer) 대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훗날 담요와 손수건을 보충하는 트렌트의 청구서를 승인해 주었다. 이 청구서의 존재가 실행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다.
역사를 정직하게 다루기 위해 두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첫째, 애머스트-부케의 편지와 트렌트의 실행은 별개의 사건이다. 포트 피트의 담요 배포는 애머스트의 지시를 받아 이뤄진 것이 아니라, 현장 인물들이 독자적으로 먼저 저지른 일이다. 애머스트의 편지는 실행 명령서라기보다 상급자의 잔혹한 '아이디어 제안'에 가까웠고, 부케가 실제로 그것을 추가 실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둘째, 의도와 결과는 다르다. 1763년 여름 포트 피트를 포위하던 원주민들 사이에 실제로 천연두가 번졌지만, 그것이 트렌트의 담요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그 지역에 돌던 천연두의 자연 확산 때문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당시 담요를 매개로 한 천연두 전파의 효율은 낮았을 것이라는 의학적 회의론도 있다. 스토니브룩대의 역사학자 폴 켈튼 같은 전문가들은 포트 피트를 "문서로 입증된 유일한 사례"로 인정하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이 신중함은 사건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의도의 명백함은 결과의 불확실성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유죄이기 때문이다. 감염된 물건을 선물로 위장해 건넨 그 행위, 그것을 문서로 남긴 그 사고방식이야말로 핵심이다. 이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기록으로 입증된 최초의 생물학전 시도 중 하나로 남는다.
직접 병원체를 묻혀 건네는 것만이 무기화는 아니다. 더 흔하고 어떤 의미에서 더 잔인했던 것은 알면서도 막지 않는 방식이었다.
1837년 미주리강 대유행이 대표적이다. 그해 봄, 아메리칸 퍼 컴퍼니의 증기선 **세인트피터호(St. Peter)**가 천연두 감염자를 태운 채 미주리강을 거슬러 올라 상류의 원주민 밀집 교역지로 향했다. 배에서 천연두 증상이 나타났고, 감염 징후를 보이던 아리카라족 여성들이 마을로 돌아가도록 방치됐다. 선장 버나드 프랫은 감염자 격리 요청을 받고도, 일정 지연을 우려해 운항을 강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과는 참혹했다. 미주리강 유역에서만 최소 1만 7,000명이 사망했고, 정주 농경 부족이던 만단(Mandan)족은 사실상 절멸했다. 1837년 7월 약 2,000명이던 만단족은 그해 가을 수십 명(23명 또는 27명이라는 기록, 많게는 138명이라는 기록)만 남았다 — 인구의 약 90%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만단 추장 **네 마리 곰(Four Bears, 마토-토페)**은 죽어가며 백인을 "가장 큰 적"으로 규탄하는 마지막 연설을 남겼다.
여기서도 균형이 필요하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세인트피터호의 천연두 전파 자체를 **고의가 아니라 이윤을 앞세운 무책임(형사적 과실에 가까운)**으로 본다. 활동가 워드 처칠 등은 세인트루이스 군 병원에서 감염된 담요를 만단족에게 의도적으로 배포했다는 강한 주장을 폈지만, 이 특정 주장은 사료적 근거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방치의 책임은 분명하다. 1832년 인디언 예방접종법이 통과되었음에도, 당시 육군장관은 아리카라족보다 상류의 부족(백인 모피 사냥꾼과 갈등하던 블랙풋족 등)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접종을 확대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백신이 있었고, 위험을 알았으며, 그럼에도 특정 집단을 접종에서 배제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 뿐, 이는 죽음을 향해 문을 열어둔 것이다.
여기에 강제 수용과 밀집이라는 또 하나의 구조적 방치가 겹친다. 원주민을 좁고 척박한 보호구역에 몰아넣는 것은, 전염병이 퍼지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국가가 조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전염병은 자연재해였을 뿐"이라는 주장은 절반의 진실이다. 대멸종의 시작은 의도치 않은 병원체의 유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 유럽계 이주민과 미국 정부는 질병이 원주민 사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명확히 인지했고, 그 인지 위에서
병을 신의 심판으로 선전해 심리전 무기로 삼았고(16세기),
감염된 물건을 선물로 위장해 건넸으며(1763 포트 피트),
감염 경로를 알면서도 격리를 거부하고 백신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확산을 방치했다(1837 및 이후).
물론 각 사례의 의도성과 인과에는 학계의 논쟁이 있고, 이 글은 그 논쟁을 은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논쟁을 정직하게 드러낼 때, 하나의 결론이 더 분명해진다. 질병을 핑계로 대학살의 책임을 덜어내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원체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 병원체를 다룬 사람들에게는 의도가 있었다.

'그레이트 다잉'은 단순히 운이 나빠 바이러스에 희생된 자연재해가 아니다. 그것은 전염병 확산을 알면서도 방치한 통치 구조, 끝없는 노동 착취,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터전마저 빼앗기 위해 국가가 주도한 절멸 정책이 만들어낸 복합 참사다.
다섯 국면을 관통하는 흐름은 분명하다. 초기(1492~1533)에는 질병과 착취가 사회를 무너뜨렸고, 중기(1545~1576)에는 외래 병원체와 강제 노동이 서로를 증폭시켰으며, 후기(1830~1890)에는 국가 기구가 법과 군대로 남은 인구를 몰아냈다. "불가피한 비극"이라는 오랜 포장은, 이 각 단계마다 존재했던 명백한 의도와 책임을 흐려온 알리바이였다.
그리고 그 알리바이의 핵심에 '전염병'이 있었다. 사망의 대부분이 병으로 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곧 무죄를 뜻하지는 않는다. 앞서 보았듯 정복자와 정부는 병을 심리전 도구로 선전하고(16세기), 감염된 물건을 선물로 위장해 건네고(1763), 감염을 알면서도 격리와 백신을 거부하는(1837) 방식으로 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방치했다. 병원체에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것을 다룬 인간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박물관에 봉인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제노사이드 인정이 2019년에야 이뤄졌고, 운디드니 명예훈장 논쟁은 2026년 현재도 계속된다. 과거의 진실을 정확히 마주하고 기억하는 일 — 그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원주민 후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공존을 이야기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Koch, A. et al., "Earth System Impacts of the European Arrival and Great Dying in the Americas after 1492," Quaternary Science Reviews 207 (2019) — 인구 6,000만→600만, 소빙기 연관 연구
Vågene, Å. J. et al., "Salmonella enterica genomes from victims of a major sixteenth-century epidemic in Mexico," Nature Ecology & Evolution (2018) — 코콜리츨리 파라티푸스 C 규명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1552) — 타이노족 착취 증언
미 국방부 운디드니 명예훈장 재검토 관련 보도(2024~2026, 사우스다코타 서치라이트·CNN·군사전문지 등)
캘리포니아주 제노사이드 공식 인정 및 사과 (2019, 개빈 뉴섬 주지사)
본문의 사망자 수치는 모두 추정치이며, 특히 접촉 이전 인구와 개별 사건의 희생자 규모는 학자에 따라 편차가 큽니다. 명시된 범위와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