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대영제국의 학살 — 셀 수 없는 죽음, 그리고 불태워진 기록앞선 1편에서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 대멸종을 다루며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병원체에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것을 다룬 인간에게는 있었다."
이번 편의 주인공인 대영제국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영국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 기록을 조직적으로 불태웠다.
이것이 이 편을 여느 학살 서술과 다르게 만드는 지점이다. 다른 회차들에서 사망자 추정치의 편차는 주로 자료의 부재 — 인구 통계가 없거나, 전근대라 기록이 부실하거나 — 에서 온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경우, 상당수 기록은 존재했다가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 1950~60년대 탈식민 과정에서 영국은 '레거시 작전(Operation Legacy)'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지 범죄의 증거가 될 문서들을 소각하거나 바다에 수장했다.
그래서 이 편에서 우리는 이중의 작업을 해야 한다. 지역별로 자행된 학살의 규모를 최대한 파악하는 것, 그리고 왜 그 규모를 여전히 정확히 알 수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 후자가 이 편의 진짜 주제다.
먼저 인도 대기근으로 시작해, 오세아니아·아프리카·아시아·아일랜드로 시야를 넓힌 뒤, 마지막에 은폐의 구조로 돌아온다.
연도 | 지역 | 사건 | 규모 |
|---|---|---|---|
1649~1653 | 아일랜드 | 크롬웰 침공, 드로이다·웩스퍼드 학살 | 드로이다 약 3,000명 / 전체 인구 15~50% 감소 추정 |
1757 | 인도 | 플라시 전투 — 동인도회사 벵골 지배 | — |
1770 | 인도 | 벵골 대기근 | 약 1,000만 명 |
1803~1832 | 타스마니아 | 블랙 워, 블랙 라인(1830) | 원주민 3,000~7,000명 → 생존 약 200명 |
1838 | 호주 | 마이알 크리크 학살 | 28명 (가해자 처형된 예외적 사례) |
1845~1852 | 아일랜드 | 대기근 (곡물 수출 지속) | 사망 약 100만 명, 이민 100만 명+ |
1857 | 인도 | 세포이 항쟁 보복 학살 | 집계 없음 (수만~수십만 추정) |
1876~1878 | 인도 | 남인도 대기근 (리턴 총독) | 550만~1,000만 명 |
1898 | 수단 | 옴두르만 전투 — 맥심 기관총 | 수단군 1만 명+ / 영국측 50명 미만 |
1899~1902 | 남아프리카 | 보어 전쟁 강제수용소 | 보어인 약 2만 6,000명 + 흑인 1만 4,000~2만 5,000명 |
1919 | 인도 | 암리차르 학살 | 공식 379명 / 인도측 1,000명+ |
1943 | 인도 | 벵골 대기근 (처칠 내각) | 약 300만 명 |
1948 | 말라야 | 바탕 칼리 학살 | 24명 (+ 규정 27A 소급 입법) |
1952~1960 | 케냐 | 마우마우 진압, 수용소 고문 | 1만 1,000~30만 명 (추정 편차 30배) |
1950s~60s | 전 식민지 | 레거시 작전 — 문서 소각·수장 | 수백만 건 파기 |
1992 | 호주 | 마보 판결 — 테라 눌리우스 법리 폐기 | — |
2011 | 영국 | 햄슬로프 파크 '이주 문서고' 존재 폭로 | 약 2만 건 공개 |
2013 | 영국/케냐 | 마우마우 배상 합의, 헤이그 외무장관 "유감" 표명 | 5,228명, 1,990만 파운드 |
2015 | 영국/말레이시아 | 바탕 칼리 대법원 최종 기각 (시효) | — |
2019 | 영국/인도 | 암리차르 100주년, 메이 총리 "깊은 유감" (사과 아님) | — |
영국 지배기(동인도회사 시기 포함, 1757~1947) 인도에서는 수십 차례의 대기근이 발생해 최소 3,000만 명, 일부 추정으로는 그 이상이 굶어 죽었다. 핵심 쟁점은 이것이 "가뭄이라는 자연재해"인가, "식민 정책이 만든 인재(人災)"인가이다.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Late Victorian Holocausts)』에서 19세기 후반 기근 사망자만 1,200만~2,900만 명으로 추산하며, 가뭄을 대량 아사로 바꾼 것은 시장 논리를 앞세운 식민 행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첫째, 수탈적 조세와 환금작물 강제. 농민들은 흉년에도 지세를 현금으로 내야 했고, 식량 대신 아편·인디고·목화 같은 수출용 작물 재배로 내몰렸다. 1770년 벵골 대기근 당시 동인도회사는 기근 와중에도 세수를 오히려 늘렸다. 벵골 인구의 약 3분의 1, 약 1,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곡물의 역설적 수출. 1876~1878년 대기근 기간에도 인도는 영국으로 밀을 계속 수출했다. 철도는 구호가 아니라 곡물 반출에 우선 사용됐다는 비판을 받는다.
셋째, 구호의 이념적 억제. 자유방임주의와 맬서스주의에 경도된 총독부는 "구호가 게으름을 조장한다"며 개입을 최소화했다. 1876~78년 기근 시기 리턴 총독의 구호 노역장은 수용자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며 극히 적은 배급만 제공해 악명을 얻었다. 이 시기 사망자는 550만~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넷째, 1943년 벵골 대기근. 약 300만 명이 사망한 이 기근에서 처칠 내각은 전시 우선순위를 이유로 구호 곡물 수송 요청을 반복적으로 거부하거나 축소했고, 일본군 침공 대비 명목의 "거부 정책(denial policy)"으로 벵골 연안의 선박과 쌀 재고를 미리 제거해 유통망을 마비시켰다. 이 기근의 책임 소재는 지금도 영국 안팎에서 가장 뜨거운 역사 논쟁 중 하나다.
아마르티아 센(노벨경제학상)은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에서 대기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명제를 인도 사례로 입증했다. 같은 몬순, 같은 땅에서 독립 이후 대량 아사가 사실상 사라졌다. 이 사실 하나가 기근의 본질이 강우량이 아니라 통치 구조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기근만이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무력 시위 진압을 명목으로 한 직접 학살도 반복됐다.
1857년 세포이 항쟁 보복 학살: 항쟁 진압 후 영국군은 포로를 대포 포구에 묶고 발포해 신체를 분쇄하는 처형(blown from guns)을 대대적으로 집행했다. 이는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시신조차 남기지 않아 힌두·무슬림의 장례 의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산된 모욕이었고, 구경거리로 공개 집행됐다. 동조 혐의만으로 마을 전체가 불태워지고 주민이 학살됐다. 사망자 규모는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추정되나 집계 자체가 없다.
1919년 암리차르(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펀자브주 암리차르의 사방이 막힌 광장에 시위와 축제를 위해 모인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다이어 준장이 이끄는 병력이 유일한 출구를 막아선 채 10여 분간 사격했다. 공식 집계 379명 사망, 인도 측 주장 1,000명 이상, 부상 1,200명 이상. 주목할 점은 다이어가 이후 조사에서 **"단지 해산이 아니라 본보기(moral effect)를 만들려 했다"**고 스스로 진술했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 내에서 오히려 영웅 대접을 받으며 시민 성금을 받았다. 영국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2019년 테리사 메이 총리의 "깊은 유감" 표명이 최대치였다).
그림 : 1877년 방갈로르 구호소에서 배급을 기다리는 굶주린 주민들. 출처: Wikimedia Commons - Wikimedia.org
이 시기 리턴(Lytton) 총독은 자유시장 논리를 앞세워 곡물 가격 통제를 거부했고, 오히려 구호 수용소의 배급량을 하루 1파운드 이하(성인 기준 필요한 열량의 절반 이하)로 제한하여 수용소가 또 다른 죽음의 장소가 되게 만들었다.
사진 : 1943년 벵골 대기근 당시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어머니. 출처: The Boston Globe
당시 처칠 내각의 곡물 반출 정책과 유통망 통제(거부 정책)로 인해 벵골의 농촌 지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식량을 찾아 캘커타(현 콜카타) 등 대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백만 명의 이재민들은 길가에서 쓰러져 숨져갔다. 영국의 보도 검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진 기록들이 유출되면서 식민지 인도 통치의 민낯이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영국은 호주 대륙을 '주인 없는 땅(Terra Nullius)'으로 규정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법적 장치였다. 원주민에게 토지 소유권이 없다고 선언하면, 토지 강탈은 절도가 아니라 개척이 되고, 저항은 항쟁이 아니라 범죄가 된다. 호주 대법원이 이 법리를 뒤집은 것은 무려 **1992년(마보 판결)**이었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인구는 1803년 영국 도착 시점에 3,000~7,000명으로 추정된다(린들 라이언은 7,000명, 니콜라스 클레먼츠는 3,000~4,000명으로 본다). 1830년대 초, 살아남은 이는 약 200명이었다.
1826년 아서 부총독은 정착민이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사살할 수 있는 조건을 담은 포고를 냈고, 언론은 이를 "원주민에 대한 선전포고"로 읽었다. 이후 계엄령 아래 정착민의 원주민 살해는 사실상 면책됐다.
1830년의 '블랙 라인(Black Line)' 작전에서는 2,200명(그중 700명이 죄수 노동력)이 인간 사슬을 이뤄 섬을 훑으며 원주민을 반도로 몰아넣으려 했다.
여기서 정확히 짚을 것: 흔히 "블랙 라인에서 수천 명이 학살됐다"고 서술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블랙 라인 작전 자체의 직접 체포·사살자는 극소수였다(체포 2명, 사살 2명이라는 기록). 오히려 진실은 더 참혹하다. 1830년 시점에 이미 죽일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804년 약 6,000명이던 정착지역 원주민은 1826년 1,200명, 1830년 8월에는 약 250명으로 줄어 있었다. 대량 살상은 블랙 라인 이전 수년간의 산발적 학살·질병·납치를 통해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이것이 제노사이드인지는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헨리 레이놀즈는 영국 정부가 절멸을 계획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1948년 UN 제노사이드 협약 정의에는 맞지 않는다고 본다(실제로 1830년 조지 머리 경은 아서에게 "그 인종의 절멸은 영국 정부의 성격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반면 린들 라이언은 학살이 조직적 과정의 일부였고 당국의 승인을 받았다고 결론짓는다. 다만 의도의 유무와 무관하게 한 사회가 사라졌다는 결과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백인 축산업자들이 평화롭게 지내던 원주민 여성·아동·노인 등 28명을 학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 사건이 유명한 이유는 역설적이다. 영국 법정이 예외적으로 주동자 7명을 교수형에 처한, 거의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외성이야말로 나머지 수백 건의 학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말해준다 — 즉, 처벌되지 않았다.
호주 뉴캐슬대학교의 '식민 프런티어 학살 지도(Colonial Frontier Massacres in Australia, 1788–1930)' 프로젝트는 8년에 걸쳐 프런티어 학살을 전수 조사했다. 2022년 종료 시점의 최종 집계는 이렇다.
학살 438건, 원주민 사망 10,374명
정의: "한 작전에서 무방비 상태의 6명 이상을 고의적·불법적으로 살해한 사건"
같은 기간 원주민에 의한 정착민 학살: 12건, 152명
그리고 연구팀 스스로가 이 수치를 **"보수적(conservative)"**이라고 명시한다. 즉 증거가 남아 있는 것만 센 숫자다. 라이언 교수의 말대로 "학살을 겪지 않은 원주민 공동체를 찾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438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흥미로운 발견도 있었다. 학살은 초기(1788~1860)보다 후기(1860~1930)에 더 많았다. 식민화가 진행될수록, 그리고 북부로 갈수록 살상은 더 늘고 잔혹해졌다.
이 프로젝트가 중요한 이유는 숫자 자체보다 방법론에 있다. 기록을 하나하나 대조해 "여기서 몇 명이 죽었다"를 확정하는 이 작업이 8년이 걸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가 여전히 "최소치"라는 사실. 학살의 규모를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림 : 호주 뉴캐슬 대학교 연구진이 구축한 식민지 프런티어 학살 지도. 출처: University of Newcastle
지도 위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노란색 점들과 하늘색 사각형들은 1788년부터 1930년 사이 영국 이주민과 경찰, 군대에 의해 최소 6명 이상의 비무장 원주민이 한자리에서 살해당한 '대량 학살(Massacre)'의 현장을 나타낸다.
지도가 증명하는 사실들:
조직적 전면전의 양상: 학살지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동부 해안(시드니, 멜버른 인근)에서 시작해 서부, 북부 및 내륙 사막 지대까지 호주 전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영국의 호주 식민화가 평화적인 정착이 아니라, 원주민을 무력으로 축출하기 위한 '프런티어 전쟁(Frontier Wars)'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한다.
공식 확인된 희생: 이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프로젝트(수석 연구원 린달 라이언 교수 주도)를 통해 공식 확인된 학살 사건만 400건 이상에 달하며, 이로 인해 희생된 원주민 수는 최소 1만 명 이상으로 집계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록되지 않은 학살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가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일방적인 학살 비율: 지도에 기록된 학살 사건 중 원주민이 백인 정착민을 공격해 발생한 사건(하늘색 표시 등)에 비해, 백인이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공동체를 일방적으로 습격해 학살한 사건(노란색 표시)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프런티어 학살의 보편적 메커니즘
이 지도에 나타난 참상은 호주뿐만 아니라 북미(미국·캐나다의 인디언 학살), 남아프리카 등 영국의 다른 영토령 식민지 프런티어(개척 전선)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 공식이었다.
백인 정착민들이 목축과 농경을 위해 영토를 침범한다.
수만 년간 살던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저항(가축 습격 등)한다.
영국 식민 당국과 정착민 세력은 이를 '반란'이나 '치안 교란'으로 규정하고, 압도적인 화기를 동원해 부족원 전체를 몰살하는 방식으로 보복한다.
이 지도는 제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개척'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진 원주민들의 피비린내 나는 희생을 보여주는 가장 객관적이고 고발적인 역사적 증거다.
1898년 나일강 유역(유프라테스강이 아니다) 옴두르만에서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이집트 연합군이 수단 마흐디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전투가 아니라 산술 문제였다. 새로 도입된 맥심 기관총과 포병이 밀집 돌격하는 수단군을 갈아냈고, 몇 시간 만에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영국-이집트 측 전사자는 50명 미만이었다.
당시 종군기자 겸 기병 장교로 참전한 윈스턴 처칠조차 이를 학살에 가깝다고 기록했으며, 부상자 처리 방식을 비판했다. 전투 후 키치너는 마흐디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훼손하고 두개골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려 했다(여론의 압박으로 결국 매장됐다). 이 사건은 기술 격차가 곧 학살 면허가 되는 제국주의 후기의 성격을 압축한다.
그림 : 돌격을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영국 제21창기병대(Lancers). 출처: Print Collector / Print Collector/Getty Images
옴두르만 전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극적인 순간이자, 대영제국 고전 기병대의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돌격 장면을 묘사한 회화이다. 당시 21세의 젊은 소위였던 윈스턴 처칠도 이 기병대의 일원으로 참가해 돌격했다.
옴두르만 전투(Battle of Omdurman, 1898년 9월 2일)는 대영제국의 아프리카 침탈(Scramble for Africa) 과정에서 근대적 과학 기술이 결합한 압도적 화력이 원시적인 용기를 어떻게 '학살'했는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이정표이다.
키치너 장군의 명령에 따라 기병대는 퇴각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해 돌격했으나, 마른 하천 뒤에 매복해 있던 2,500여 명의 수단 전사들과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이 돌격으로 영국 기병대는 불과 몇 분 만에 대원 4분의 1을 잃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처칠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 숨 막히는 백병전의 공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림 : 나일강에서 옴두르만의 마흐디 요새를 향해 함포를 난사하는 영국 무장 증기선. 출처: ilbusca / Getty Images
영국 증기선들이 강상에서 자욱한 포연을 내뿜으며 옴두르만의 진흙 요새와 마흐디 군의 방어선을 향해 대포와 궤틀링건, 맥심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대 주간지 삽화이다.
육상의 보병선이 적과 마주하기도 전에, 이 무장 증기선들은 강 위에서 안전하게 마흐디 군의 후방과 요새를 초토화했다. 수단 전사들의 구식 무기로는 강 위의 철갑선에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수단 자원군(마흐디파 아랍 전사들) 약 5만 명은 칼과 창, 구식 소총을 들고 종교적 신념 하나로 돌격했으나,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이 이끄는 영국-이집트 연합군의 맥심 기관총, 속사포, 그리고 나일강의 함포 사격 앞에 다가서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옴두르만 전투는 양측의 무기 체계 격차가 불러온 학살의 극치였다.
마흐디 군(수단 전사): 약 50,000명 참전 $rightarrow$ 약 10,000명 사망, 13,000명 부상
영국-이집트 연합군: 약 25,000명 참전 $rightarrow$ 단 47명 사망, 382명 부상
당시 종군기자들은 수단 전사들이 신앙심에 가득 차 휘날리는 깃발을 들고 일렬로 돌격해 들어왔으나, 분당 600발을 쏟아내는 맥심 기관총(Maxim Gun) 진지 앞 500m도 접근하지 못하고 가을 낙엽처럼 쓸려 나갔다고 증언했다.
당시 영국의 시인 힐레어 벨록(Hilaire Belloc)은 제국주의 세력의 이 압도적인 기술적 거만함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구로 풍자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우리에겐 맥심 기관총이 있고 그들에겐 없다."
(Whatever happens, we have got / The Maxim Gun, and they have not.)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 게릴라전에 고전하던 영국군 사령관 키치너는 초토화 작전을 폈다. 농가를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우물을 메운 뒤, 갈 곳 없어진 민간인을 수용소에 몰아넣었다. 보어인용 45개, 흑인용 64개 수용소가 세워졌다.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사망자 | 비고 |
|---|---|---|
보어인 (백인) | 약 2만 6,000명 | 여성 4,177명, 16세 미만 아동 22,074명, 남성 1,676명 |
흑인 아프리카인 | 공식 14,154명 | 기록 불량으로 실제 2만~2만 5,000명 추정 |
두 숫자의 성격 차이를 보라. 보어인 사망자는 여성·아동별로 집계되어 있다. 흑인 사망자는 "기록이 부실해 알 수 없다." 흑인 수용소 사망자의 81%가 아동이었다는 사실조차 개략적 추정이다. 여기서 이미 이 편의 주제가 드러난다. 무엇을 세느냐, 세지 않느냐가 곧 위계다.
1901년 10월 백인 수용소의 사망률은 1,000명당 최대 390명에 달했다. 전장에서 죽은 남성보다 수용소에서 죽은 여성과 아동이 훨씬 많았다.
이 참상을 폭로한 사람이 영국인 활동가 **에밀리 홉하우스(Emily Hobhouse)**다. 그녀는 1901년 수용소를 방문해 보고서를 냈고, 영국 정부는 그녀를 "친(親)보어 히스테리 여성"으로 몰았다(키치너는 블룸폰테인 이북 방문을 금지했다). 그러나 정부가 반박을 위해 파견한 포셋 위원회조차 그녀의 보고가 본질적으로 정확함을 확인했다. 홉하우스가 흑인 수용소는 시간과 자원 부족으로 방문하지 못했다는 점도 기록해 둘 만하다.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는 용어와 시스템이 20세기에 본격 등장한 무대가 바로 여기다. 40년 뒤 유럽에서 벌어질 일의 기술적 원형이 식민지에서 먼저 시험됐다.
사진 : 보어 전쟁 당시 남아프리카 전역에 설치되었던 천막 수용소 전경. 출처: DEA / BIBLIOTECA AMBROSIANA / De Agostini via Getty Images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당시 영국군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대에 건설한 강제수용소는 현대식 수용소(Concentration Camp)의 기틀이 된 비극적인 역사적 현장이다.
황량한 벌판 위에 끝없이 펼쳐진 흰색 군용 천막들을 볼 수 있다. 이 수용소들은 급조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배수, 위생 시설, 방한 및 방열 대책이 전무했다.
열악한 환경: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밤의 혹독한 추위가 그대로 천막 내부로 전달되었다. 밀집된 천막 구조와 불결한 식수원으로 인해 홍역, 장티푸스, 이질 같은 전염병이 한 번 돌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번져나갔다.
당시 영국군 사령관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은 보어인 게릴라들의 보급로와 은신처를 차단하기 위해 농가를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타는 '초토화 작전(Scorched Earth Policy)'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보어인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흑인 원주민들이 수용소로 강제 압송되었다.
사진 : 수용소 천막 앞에 모여 선 보어인 여성과 아이들 (에밀리 홉하우스 기록). 출처: www.scielo.org.za
초토화된 농가에서 쫓겨나 수용소에 갓 도착한 보어인 대가족(여성들과 수많은 아이들)이 천막 앞에 모여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 아래에는 에밀리 홉하우스가 남긴 친필 메모가 적혀 있다.
"이 과밀한 가족의 상태는 6주 후 극도로 비참해졌다. (The condition of this overcrowded family six weeks later was pitiable in the extreme.)"
비극적인 사망률: 실제로 이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식량을 배급받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전투원(게릴라)의 가족에게는 배급량을 더 줄이는 졸렬한 차별 대우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용된 아이들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렸으며, 보어인 여성과 아동 약 26,000명이 사망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인 22,000명 이상이 16세 미만의 어린이들이었다.
기록에서 지워진 흑인 수용소의 비극
보어 전쟁 강제수용소 역사에서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사실 중 하나는, 백인인 보어인들뿐만 아니라 최소 11만 명 이상의 흑인 원주민들도 별도의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이 흑인 수용소의 환경은 보어인 수용소보다 훨씬 더 가혹했으며, 기록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공식 역사에 기록된 흑인 사망자만 14,000명 이상이지만, 학자들은 실제 사망자가 최소 2만 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영국 야당의 지도자였던 헨리 캠벨-배너먼(훗날 총독)은 영국 정부의 이러한 행태를 두고 "야만의 방책(Methods of Barbarism)"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이 수용소들은 나치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기 수십 년 전,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해 인간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방치하고 도살할 수 있는지' 보여준 끔찍한 전초전이었다.
토지 반환을 요구한 키쿠유족 중심의 마우마우 봉기에 영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수용·심문 체계를 가동했다.
규모부터 보자. 영국 당국 공식 집계로 8만 명 구금, 캐롤라인 엘킨스의 추정으로는 16만~32만 명이 수용소에 갇혔고, 그 외 **100만 명 이상의 키쿠유인이 철조망 두른 '통제 마을'**에 강제 이주됐다. 수용소에서는 체계적 고문이 자행됐다 — 구타, 거세, 성폭행, 귀 절단, 고막 천공, 파라핀을 끼얹고 불붙이기. 사형 집행만 1,090건으로, 대영제국 어느 시기 어느 장소보다 사형이 공격적으로 집행됐다(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처형한 수의 두 배 이상이다).
사망자 추정은 크게 갈린다.
추정자 | 사망자 | 근거 |
|---|---|---|
영국 공식 | 약 1만 1,000명 | 마우마우 전투원 사살 집계 |
데이비드 앤더슨 | 약 2만 5,000명 | 문서·재판 기록 분석 |
존 블래커 (인구학자) | 약 5만 명 | 인구 통계, 절반이 10세 이하 아동 |
캐롤라인 엘킨스 | "수만~수십만", 최대 30만 명 | 구술 증언 + 센서스 분석 |
엘킨스의 30만 명 주장은 학계에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블래커는 1962·1969년 센서스에 그런 규모의 인구 공백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고, 엘킨스가 스스로 스승으로 꼽은 존 론스데일조차 그녀의 통계 분석을 "솔직히 믿기 어렵다"고 평했다. 이 글은 그 비판을 감추지 않는다. 부풀린 숫자는 부정론자에게 무기를 쥐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 그리고 여기가 결정적인데 — 엘킨스의 숫자가 틀렸을지언정, 그녀와 앤더슨의 연구가 촉발한 것은 숫자를 넘어선 무엇이었다.
2009년, 마우마우 생존자 5명이 케냐인권위원회와 영국 로펌 레이데이의 도움으로 영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케냐 국립문서보관소는 "마우마우 관련 기록이 없다"고 답했다.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영국 정부가 감춰온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2013년 6월 6일,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은 하원에서 케냐인들이 식민 당국에 의해 고문당했음을 공식 인정하고 "진심 어린 유감"을 표명했다. 확인된 피해자 5,228명에게 1인당 2,600파운드씩 총 1,990만 파운드를 배상하고, 나이로비 우후루 공원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대영제국 역사상 식민지 범죄에 대한 사실상 최초의 배상이었다.
그런데 이 소송이 남긴 진짜 유산은 배상금이 아니었다.
런던 고등법원 앞에 선 케냐 마우마우 항쟁의 고령의 생존자들. 출처: Peter Macdiarmid / Getty Images
1948년 12월 12일, 말라야 비상사태 초기. 영국군 스코츠 가드 2대대 7소대가 슬랑오르주 바탕 칼리 인근 고무 농장 마을을 포위했다. 남성과 여성·아동을 분리하고, 모의 처형까지 동원한 심문을 밤새 진행했다. 이튿날 아침 여성과 아동을 트럭에 실어 내보낸 뒤, 남은 비무장 남성 23명을 자동화기로 사살했다(전날 밤 1명이 이미 살해되어 총 24명). 마을은 불태워졌다. 유일한 성인 남성 생존자 총홍은 기절해 죽은 것으로 오인되어 살아남았다.
주목할 것은 그 이후다.
첫째, 즉각적 조작. 영국군은 "24명 전원이 도주하려다 사살됐다"는 공식 발표를 내놨다. 이 부대는 대부분 국민병(national servicemen)이었고, 순찰대를 이끈 것은 22세의 하사관이었다.
둘째, 소급 합법화. 학살 이후 영국 당국은 "체포로부터의 도주를 막기 위한 살상 무기 사용"을 허용하는 규정 27A를 도입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사후적으로 합법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법이 학살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학살 뒤를 법이 덮으러 온 것이다.
셋째, 반복된 종결. 1970년 영국 경찰이 재수사에 착수해 참여 병사들이 "도주 시도는 없었고, 사살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지만, 법무장관은 기소에 충분한 증거가 나오기 어렵다며 수사를 중단시켰다. 말레이시아 왕립경찰도 1997년 파일을 닫았다.
넷째, 법정의 실토. 2012년 유족들이 영국 법원에 공개 조사를 청구했다. 법원은 조사 의무는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176개 문단의 판결문에서 증거를 검토한 끝에 의회에 제출됐던 "공식 설명"을 더 이상 유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2015년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공개 조사 청구를 기각했다 —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이유로. 다만 사망이 영국의 관할권 안에 있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2018년 유럽인권재판소도 각하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영국 법원은 학살이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고, 어떤 조사도 열리지 않았다. '영국판 미라이 학살'이라 불리는 이유다.
바탕 칼리의 사망자는 24명이다. 인도의 3,000만 명, 호주의 1만 명에 비하면 작은 숫자다. 그럼에도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는 이유는, 여기에 대영제국 식민 폭력의 처리 방식 전체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작된 공식 발표 → 사후 입법으로 소급 정당화 → 재수사 착수와 상부의 중단 → 수십 년 뒤 법정의 절반의 인정 → 그러나 시효를 이유로 한 최종 기각. 규모가 작아서 오히려 전 과정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이 소송이 가능해진 것도, 마우마우 소송이 열어젖힌 문서고 덕분이었다.
대영제국의 식민 통치 기법은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옆 섬에서 먼저 개발됐다.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의회군이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9월 드로이다(Drogheda) 함락 후 무장 해제된 수비대와 성직자, 민간인 등 약 3,000명이 학살됐다. 크롬웰 본인이 이를 의회에 보고하며 "신의 정의로운 심판"이라 표현했고, 이것이 다른 도시들의 항복을 유도할 것이라 명시했다. 몽골의 논리와 정확히 같다 — 계산된 시범적 공포다. 한 달 뒤 웩스퍼드에서 같은 일이 반복됐다.
침공 자체보다 그 이후가 더 파괴적이었다. 전쟁·기근·역병으로 아일랜드 인구의 상당 부분(추정치는 15~50%까지 크게 갈린다)이 사라졌고, 수천 명이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해 농장으로 강제 이송됐다. 이후 **정착법(Act for the Settlement of Ireland, 1652)**은 가톨릭 지주의 토지를 대규모로 몰수해 잉글랜드 채권자와 병사들에게 재분배했다. 조직적 토지 몰수, 종교적 타자화, 시범적 학살, 강제 이주 — 훗날 제국 전역에서 반복될 문법이 여기서 완성됐다.
1845년 감자마름병으로 시작된 대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이민을 떠나, 아일랜드 인구는 20~25% 감소했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로 곡물과 가축이 계속 수출됐다. 재무성의 찰스 트리벨리언은 구호를 시장 원리에 맡겨야 한다며 개입을 축소했고, 기근을 "신이 아일랜드의 과잉 인구 문제에 내린 효과적 해법"이라는 취지로 언급했다.
30년 뒤 인도에서 리턴 총독이 되풀이할 논리가 여기 있다. 아일랜드는 리허설이었다.
그림 : Illustrated London News에 게재된 아일랜드 대기근의 참상. 출처: Mansell
옷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누더기를 걸치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의 부모와 아이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썩어버린 감자밭을 파헤쳐 먹을 만한 조각을 찾거나, 구걸을 하기 위해 길가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유방임주의의 칼날: 당시 영국 재무부 차관 찰스 트레벨리언(Charles Trevelyan)은 "기근은 아일랜드인들의 게으름과 과잉 인구를 치유하기 위한 신의 섭리"라는 오만한 태도로 식량 원조나 가격 통제를 철저히 억제했다. 이로 인해 굶주림은 들불처럼 번져나다.
그림 : 지주들에 의해 집이 무너지고 쫓겨난 이재민들이 길가에 방치된 모습. 출처: Mansell
대기근을 수백만 명의 아사로 이끈 또 다른 주범은 영국의 부재지주(지주가 현지에 살지 않고 마름을 통해 수탈하는 구조)들이 자행한 '강제 퇴거'였다.
그림은 지붕이 뜯겨나가고 벽만 간신히 남은 채 폐허가 된 집들과, 그 길거리에 주저앉아 절망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 소작농들이 기근으로 인해 감자 수확에 실패하여 소작료(세금)를 내지 못하자, 영국의 지주들은 이들을 가차 없이 땅에서 쫓아냈다. 소작인들이 다시 기어들어와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군대와 마름들을 동원해 소작농의 오두막 지붕을 부수고 불태웠다.
가족들은 당장 눈보라가 치는 겨울 길거리로 내몰렸고,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림 : 대기근 기간 동안 주민들이 전멸하거나 쫓겨나 폐허가 된 마을. 출처: Historical / Corbis via Getty Images
지붕이 뜯겨나간 집들이 흉물스럽게 줄지어 서 있는 버려진 마을(Movern)을 묘사하고 있다.
역설의 절정: 이 비극적인 기근 중에도 아일랜드 땅에서 생산된 엄청난 양의 밀, 보리, 소고기, 돼지고기, 버터 등은 영국의 식탁을 채우기 위해 군대의 호위 하에 지속적으로 영국 본국으로 수출되었다. "곡물 수출을 막으면 시장 경제가 교란된다"는 영국의 교조적인 자유시장 논리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신은 감자 역병을 보냈지만, 대기근을 만든 것은 영국 정부였다."
(Go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 민족주의 작가, 존 미첼(John Mitchel)
이 대기근을 기점으로 아일랜드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아일랜드의 인구는 대기근 이전의 전성기 인구(약 800만 명)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비극은 아일랜드인들의 가슴에 영국에 대한 지울 수 없는 흉터와 적개심을 남겼고, 훗날 끊임없는 무장 독립 투쟁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도화선이 되었다.
이제 이 편의 핵심으로 간다.
역사학자들은 대영제국 통치를 관통하는 전술로 **'시범적 공포(exemplary terror)'**를 꼽는다. 소수의 영국인이 수억 명을 지배하려면, 폭력의 총량보다 폭력의 가시성이 중요했다. 드로이다에서 3,000명을 죽여 다른 도시의 항복을 얻고, 세포이 항쟁 포로를 대포로 날려 구경시키고, 암리차르에서 "본보기(moral effect)"를 만든다. 공포는 보여줘야 작동한다.
그런데 제국은 그 반대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켰다. **'망각'**이다. 공포는 식민지 현지인에게 보여주되, 기록은 본국과 후세에게 감춘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 두 번째 기술이 국가적 프로젝트로 제도화된다.
1950~60년대 탈식민 과정에서, 영국 식민성은 식민지에서 철수하는 관리들에게 문서 처리 지침을 하달했다. 문서는 분류됐다.
"여왕 폐하의 정부를 당혹스럽게 할(embarrass Her Majesty's Government)" 문서
"후임 정부에 의해 불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서
이런 문서는 파기 대상으로 지정됐다. 식민지 총독들은 문서 '솎아내기(weeding)'를 감독할 위원회를 구성했고, 파기가 완료되었음을 증명하는 **파기 증명서(destruction certificate)**를 발행해야 했다. 런던의 식민성/외무성은 분류 목록을 보유하고 이행을 감시했다.
소각이 여의치 않으면 대안이 제시됐다. 한 식민성 문서(FCO 141/6971)는 이렇게 적고 있다 — 화재에 의한 파기의 대안으로, 문서를 무게추를 단 상자에 담아 해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깊고 물살 없는 바다에 투기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파기를 면한 일부 문서는 비밀리에 영국으로 실려가 **햄슬로프 파크(Hanslope Park)**라는 정부 시설에 보관됐다. 이것이 훗날 '이주 문서고(migrated archives)'로 불리게 된다.
규모는 이렇다.
영국으로 옮겨진 파일: 약 2만 5,000건(주요 추정)
소각되거나 바다에 버려진 문서: 수백만 건
2011년, 마우마우 소송 과정에서 영국 정부가 수십 개 식민지 정부의 문서를 비밀리에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수십 년간 역사학자들에게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공무원들이 존재를 부인해 온 문서고였다.
이후 약 2만 건이 국립문서보관소(TNA)로 이관되어 공개됐다. 그 안에는 케냐 '파이프라인' 수용 체계의 실상, 심문 과정의 고문과 성폭력 기록이 들어 있었다. 파일 중에는 "이 파일은 남성 사무원만 취급하고 수령할 것"이라는 경고가 붙은 것도 있었다 — 내용이 무엇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나온 것이 **수천 장의 '파기 증명서'**였다. 없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 연구자들은 이를 **"부재의 기록", "소거의 문서고(archive of erasure)"**라 부른다. 은폐 행위 자체가 자기 자신의 서류 흔적을 남긴 셈이다.
2015년 이후에도 FCO 141 시리즈 문서는 원 소유국에 반환되지 않았다. 케냐 정부는 1960년대부터 반환을 요청해 왔고, UN·비동맹운동·아프리카연합까지 이 문제에 관여했으나 성과가 없다.
파기된 문서의 목록 자체가 공개되지 않았다. 무엇이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홍콩 식민 정부 문서 8만 8,000건은 여전히 햄슬로프 파크에 있으며, 일부는 2047년까지 유효한 50년 보존 명령으로 보호되고 있다.
캐롤라인 엘킨스는 최초 공개 당시 가디언 기고에서, 향후 소송 가능성이 남은 키프로스·말라야 같은 식민지의 파일이 유독 부실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영국령 기아나(현 가이아나)의 경우, 외무성은 햄슬로프에 관련 민감 문서가 없다고 주장한다. 1953년 민선 정부를 영국군이 전복하고 1962~64년 영미 합동 비밀 공작(테러 폭탄, 정치인 구금, 흑색선전)이 벌어진 곳인데도 그렇다. 한 역사학자는 이 주장 하나가 공개 절차 전체의 신뢰성을 무너뜨린다고 평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대영제국은 몇 명을 죽였는가?
정직한 답은 "모른다"이다. 그리고 이 무지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도 대기근 3,000만~5,000만 명 — 식민 당국의 인구·기근 통계 자체가 불완전하고 정치적으로 조정됐다.
호주 프런티어 학살 — 8년의 전수 조사 끝에 확정된 것은 438건, 10,374명. 연구팀 스스로 "최소치"라 명시.
보어 전쟁 흑인 수용소 — 공식 14,154명, 실제 2만~2만 5,000명 추정. "기록이 부실해서."
마우마우 — 1만 1,000명(공식)에서 30만 명(엘킨스)까지 편차 30배.
세포이 항쟁 보복 — 집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
각 항목마다 편차가 크고, 그 편차의 상당 부분은 기록의 부재에서 온다. 그리고 그 부재는 대부분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파기 증명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이 편의 결론이다. 대영제국의 학살에서 가장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은폐다. 우리는 소각된 문서의 목록조차 갖고 있지 않다.
사진 : 한슬롭 파크(Hanslope Park)에 보관 중이던 식민지 비밀 문서고. 출처: Commonwealth Opinion - School of Advanced Study
한슬롭 파크 정부 통신 센터(HGCC) 지하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가죽 장정의 비밀 정부 파일들이다.
역사적 의미: 영국 외무부(FCO)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중해 등 37개 전임 식민지에서 빼돌린 약 8,800여 건의 극비 문서들(소위 '와치 파일')을 이곳에 숨겨두었다. 이 보관소의 실체는 2011년 케냐 마우마우 생존자들의 끈질긴 법정 공방과 판사의 압수 명령으로 마침내 강제 폭로되었다.
사진 : 삼엄한 보안으로 둘러싸인 한슬롭 파크 기지의 공중 전경. 출처: South China Morning Post
영국의 정보기관과 외무부의 비밀 기지로 사용되는 삼엄한 경비망과 울타리로 둘러싸인 한슬롭 파크 단지의 모습이다.
제국주의의 닫힌 문: 이곳은 철저한 보안 장벽 뒤에 숨어, 영국 제국이 세계 전역에서 자행했던 반인도적 범죄 기록들을 역사와 학자들의 눈으로부터 완벽히 통제하고 차단하는 거대한 '침묵의 요새' 역할을 해왔다.
이 자료들은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가 단순히 한때의 점령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지배 역사를 아름답게 위장하기 위해 기록 자체를 철저하게 감시, 편집, 보관, 그리고 파괴하는 현대적 정보 공작(레거시 작전)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사진 : 1950년대 케냐 마우마우 봉기 진압 과정에서 영국군에게 억류된 원주민들. 출처: Socialist Worker
은폐의 표적: 당시 영국 식민 정부는 케냐의 수용소(소위 'British Gulag')에서 가혹한 고문, 영양실조 방치, 성적 학대와 거세를 자행했다. 이러한 구체적인 고문 일지와 특별 보고서들이 바로 '레거시 작전'의 주된 소각 대상이었다. 영국은 이 지옥 같은 진실을 가두기 위해 식민지에서 수천 톤의 가해 기록을 불태웠다.
1편에서 우리는 "전염병"이 어떻게 책임을 흐리는 방패로 쓰였는지 보았다. 2편에서 그 방패는 다른 형태를 띤다. 불확실성 그 자체다.
"인도 기근 사망자 수는 학자마다 다르다." "마우마우 사망자는 논쟁 중이다." "호주 프런티어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 이 문장들은 모두 사실이고, 이 글도 그 불확실성을 정직하게 표기했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이 어디서 왔는지를 함께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시 알리바이가 된다. 숫자를 확정할 수 없으니 판단도 유보하자는 논리로.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안다. 그 불확실성의 상당 부분은 만들어진 것이다. "여왕 폐하의 정부를 당혹스럽게 할" 문서를 골라내는 기준이 있었고, 그것을 태우는 위원회가 있었고, 태웠다는 증명서에 서명하는 관리가 있었고, 태우기 곤란하면 무게추를 달아 바다에 던지라는 지침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은폐는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수천 장의 파기 증명서가 그것이다.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지워졌다는 사실만은 문서로 남았다. 그 부재의 기록이야말로, 대영제국이 자신의 학살에 대해 남긴 가장 정직한 증언인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는 자국민을 상대로 평시에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인 정권을 다룬다. 마오쩌둥의 중국이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같은 질문과 마주칠 것이다 — 왜 아무도 진실을 보고하지 않았는가.
Caroline Elkins, Imperial Reckoning: The Untold Story of Britain's Gulag in Kenya (2005, 퓰리처상) 및 Legacy of Violence (2022) — 마우마우, 다만 사망자 추정치는 학계 비판 있음
David Anderson, Histories of the Hanged: The Dirty War in Kenya and the End of Empire (2005)
Mike Davis, Late Victorian Holocausts (2001) — 인도 대기근
Lyndall Ryan et al., Colonial Frontier Massacres in Australia, 1788–1930 (University of Newcastle, 2017~2022) — 438건 / 10,374명 데이터베이스
Lyndall Ryan, Tasmanian Aborigines: A History Since 1803 (2012) 및 "The Black Line in Van Diemen's Land: success or failure?" (2013)
Emily Hobhouse 보고서(1901) 및 포셋 위원회 보고서 — 보어 전쟁 수용소,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WO 32/8061
The Guardian, "Britain destroyed records of colonial crimes" (2012.4.18)
FCO 141 시리즈(이주 문서고),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 레거시 작전 1차 사료
영국 하원 의사록(Hansard),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 마우마우 배상 성명 (2013.6.6)
Chong Nyok Keyu and ors v Secretary of State (2012 고등법원 / 2015 대법원) — 바탕 칼리 판결문
Henry Reynolds, An Indelible Stain? The Question of Genocide in Australia's History (2001) — 제노사이드 논쟁의 반대편 시각
본문의 사망자 수치는 모두 추정치이며, 편차가 큰 항목은 그 편차와 논쟁을 함께 표기했습니다. 다만 이 글의 논지대로, 그 불확실성의 상당 부분은 자료의 부재가 아니라 자료의 파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안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