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 교과서가 식민 학살을 이야기할 때, 무대의 조명은 대개 두 제국에 집중된다. 아메리카를 무너뜨린 스페인(1편), 그리고 지구의 4분의 1을 지배한 대영제국(2편)이다. 이 연재도 그 둘을 먼저 다뤘다.
그러나 그 두 거인의 그늘에는 다른 제국들이 있다. 벨기에·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포르투갈. 규모로는 영국에 미치지 못했을지 몰라도, 잔혹성의 밀도로는 결코 뒤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는 훨씬 앞섰다. 한 나라의 왕이 사적으로 소유한 땅에서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고(벨기에),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가 자행됐으며(독일), 나치 절멸수용소의 사상적·인적 원형이 아프리카에서 먼저 실험됐다.
이번 편은 이 여섯 제국의 학살을 지역·시대별로 정리한다. 다만 앞선 편들과 같은 원칙을 유지한다. 사망자 수는 추정 범위와 학계 논쟁을 함께 밝히고, 단일 숫자를 확정된 사실처럼 제시하지 않는다. 특히 이 편의 사건들은 인구 조사 자체가 없던 지역에서 벌어진 경우가 많아, 숫자의 불확실성이 크다. 그 불확실성이 어디서 오는지 — 자료의 부재인지, 의도적 은폐인지 — 를 함께 짚는 것이 이 연재의 방식이다.
식민 학살의 역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례. 콩고는 벨기에라는 나라의 식민지가 아니라,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개인의 사유지였다.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선과 노예무역 근절, 자유무역을 약속하며 열강을 설득해, 벨기에 본국의 80배가 넘는 약 260만㎢의 콩고 분지를 '콩고 자유국(État indépendant du Congo)'이라는 이름으로 손에 넣었다. '자유국'이라는 이름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반어였다.
초기에는 적자였던 이 사업은 1890년대 자전거·자동차 타이어의 등장으로 천연고무 수요가 폭발하면서 돌변했다. 콩고는 거대한 고무 강제 노동 수용소가 됐다.
국왕의 사병 조직 **공안군(Force Publique)**은 마을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무 채취 할당량을 부과했다. 이를 강제하는 수단이 악명 높은 두 가지였다.
잘린 손. 병사들이 탄약을 사냥이나 다른 데 낭비하지 못하도록, 지휘관들은 "총알 한 발을 쏠 때마다 그 증거로 시신의 오른손 하나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병사들은 할당을 못 채운 원주민의 — 때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심지어 아이들의 — 손목을 잘라 바구니에 담아 바쳤다. 잘린 손은 이 체제의 상징이 됐다.
치코테(chicotte). 말린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으로, 수십 대만 맞아도 살점이 뜯기고 과다출혈이나 감염으로 죽는 일이 흔했다.
여성과 아이를 인질로 잡아 남성에게 고무를 강요하고, 할당을 채우지 못한 마을은 불태우고 학살했다.
콩고 자유국 시기(1885~1908) 인구 감소 규모는 현대 학계에서 약 120만 명에서 1,500만 명까지 추정이 갈린다. 아담 호크실드의 베스트셀러 『레오폴드 왕의 유령』이 대중화한 약 1,000만 명(당시 인구의 절반)이 가장 널리 인용되며, 브리태니커도 "1,000만 명 안팎으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서술한다. 콩고 학자 은다이웰 에 은지엠은 1,300만 명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이 연재의 원칙대로 반론도 밝혀야 한다. 벨기에 인구학자 장폴 산더슨 등은 사망의 상당 부분이 직접 학살보다 천연두·수면병 등 질병과 출생률 급락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실제로 성인 남성의 장기 동원과 공동체 파괴로 출생률이 폭락했고, 인구 손실의 큰 부분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지 못한 세대"였다. 무엇보다 레오폴드 치세 기간에는 신뢰할 만한 인구 조사 자체가 없었다(콩고의 첫 실질적 센서스는 1984년이다). 이 자료의 공백이 추정치를 10배 넘게 벌려 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숫자가 120만이든 1,000만이든, 이것이 이윤 극대화 그 자체가 절멸의 엔진이 된 사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념도 인종 증오도 아닌 순수한 상업적 착취가 한 사회를 파괴했다.
이 실상은 영국 해운회사 직원 **에드먼드 모렐(E. D. Morel)**이 무역 통계의 모순 — 콩고로 들어가는 것은 총과 사슬뿐인데 나오는 것은 막대한 고무 — 을 포착하며 폭로되기 시작했다.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트의 1904년 보고서가 이를 공식 확인했고(2편의 그 케이스먼트다),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이 여론에 불을 붙였다. 인류 최초의 근대적 국제 인권 캠페인이 여기서 탄생했다.
국제 압력에 밀린 레오폴드 2세는 1908년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매각했다(공짜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막대한 대가를 받았다). 그리고 양도 직전, 그는 콩고 관련 문서를 대대적으로 소각했다. 2편에서 본 영국의 '레거시 작전'을 반세기 앞서 실행한 셈이다. "내 콩고를 그들에게 주겠지만, 내가 거기서 한 일을 알 권리는 그들에게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레오폴드 2세는 평생 단 한 번도 콩고 땅을 밟지 않았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에서 토지 강탈에 맞서 헤레로족이, 이어 나마족이 봉기하자, 빌헬름 2세는 로타어 폰 트로타 중장을 파견했다. 1904년 8월 바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포위한 독일군은 퇴로를 오직 오마헤케 사막 방향으로만 열어둔 채 몰아넣고, 사막 외곽을 봉쇄하고 우물을 차단했다. 물을 찾아 사막을 헤매던 사람들이 갈증과 굶주림 속에 죽어갔다.
1904년 10월, 폰 트로타는 문서로 남은 **절멸 명령(Vernichtungsbefehl)**을 포고했다. 독일 국경 안의 모든 헤레로인은 무장 여부·남녀노소와 무관하게 사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국가가 특정 민족의 절멸을 명문화한 이 사건이, 통상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불린다.
사망 규모는 **헤레로족 약 6만 5,000명(인구의 약 80%), 나마족 약 1만 명(약 50%)**으로, 합쳐 7만~7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사막에서 살아남아 투항한 이들은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로 보내졌다. 뤼데리츠 앞바다의 샤크 아일랜드(상어섬) 수용소는 수용자 태반이 죽어 "죽음의 섬"으로 불렸다.
이 사건을 홀로코스트와 잇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하나는 인적 연결이다. 남서아프리카 초대 총독 하인리히 괴링은 훗날 나치 2인자가 되는 헤르만 괴링의 아버지였다. 다른 하나는 사상적 연결이다. 인종주의 인류학자 오이겐 피셔가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우생학 연구를 수행했는데(수감자들에게 죽은 동족의 두개골에서 살을 발라내게 한 뒤 베를린으로 보냈다), 그는 훗날 나치 인종 이론에 영향을 미쳤고 요제프 멩겔레의 학문적 계보와 연결된다. 나미비아는 홀로코스트의 구조적·사상적 실험장이었다.
독일은 2015년 이를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기 시작해, 2021년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사과하며 11억 유로(약 30년에 걸친 개발 지원)를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를 법적 배상이 아닌 '개발 원조(ex gratia)'로 못 박았고, 헤레로·나마 대표들은 자신들이 협상에서 배제됐으며 직접 배상이 아니라는 점에 강하게 반발했다. 2025년 나미비아는 첫 '제노사이드 추모의 날'을 열고 배상을 다시 촉구했다. 117년이 걸린 인정조차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 독일령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에서는 강제 면화 재배에 맞선 마지마지 봉기가 일어났다. "성수(聖水, maji)가 독일군의 총알을 물로 바꾼다"는 믿음으로 여러 부족이 연합했으나, 기관총 앞에 무너졌다.
주목할 것은 진압 방식이다. 총독 폰 괴첸은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과 곡식, 식량 저장고를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한 독일 지휘관(방겐하임)은 "군사 행동만으로는 바다에 물 한 방울일 뿐, 오직 굶주림과 궁핍만이 최종 굴복을 가져온다"고 기록했다. 기근을 의도적 무기로 삼은 것이다. 그 결과 '대기근(우카메)'이 뒤따랐다.
사망자는 **약 7만 5,000명(독일 공식)에서 30만 명(현대 학계)**까지 추정되며, 대부분이 전투가 아니라 기근으로 죽었다. 이 지역 일부는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 3편의 마오 시대 기근, 2편의 인도 기근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굶주림은 자연이 아니라 정책이었다.
프랑스만큼 보편적 인권의 언어를 발명한 나라도, 그 언어와 식민지 현실 사이의 간극이 큰 나라도 드물다.
1830년 알제리 침공 후, 끈질긴 저항에 부딪힌 프랑스군은 뷔조 장군의 지휘 아래 초토화 전술을 폈다. 1845년 6월, 펠리시에 대령의 부대는 다흐라 산맥의 동굴로 피신한 울레드 리아 부족민 약 1,000명을 동굴 입구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질러 연기와 유독가스로 질식시켜 몰살했다(앙퓌마드, enfumades). 동굴이 열렸을 때 생존자는 없었다. 뷔조는 "문명화는 때로 끔찍한 잔혹성을 요구한다"며 이를 정당화했다.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종전일인 1945년 5월 8일, 나치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던 바로 그날, 알제리 세티프에서는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알제리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평화 행진을 벌였다. 프랑스 경찰의 발포로 시작된 유혈은 함포 사격과 공습, 민병대 학살로 번졌다. 사망자는 프랑스 공식 집계 수천 명에서 알제리 측 주장 4만 5,000명까지 갈린다(학계는 대체로 6,000명에서 3만 명 사이로 본다). 해방의 날에 벌어진 이 학살은 이후 알제리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알제리 독립전쟁 막바지,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한복판에서 통행금지에 항의하는 알제리인 약 3만 명이 평화 행진을 벌였다. 파리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 — 비시 정권 시절 유대인을 나치에 넘긴 바로 그 인물 — 의 지휘 아래, 경찰은 시위대를 구타했고 상당수를 센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사망자는 수십 명에서 2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정부는 수십 년간 사망자를 "2~3명"으로 축소·은폐했고, 2012년에야 올랑드 대통령이 "유혈 탄압"을 인정했다.
알제리 독립전쟁 전체로 보면, 알제리 측은 150만 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고 프랑스·서구 학계는 그보다 낮게(수십만) 추정하는 등 편차가 크다. 이 숫자의 간극 자체가 여전히 양국 사이의 정치적 상처로 남아 있다.
당시 유럽에서 금값이던 향신료 **육두구(nutmeg)**는 세계에서 오직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에서만 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총독 **얀 피터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은 독점을 위해, 반다 주민이 영국과 밀무역을 했다는 구실로 섬 전체를 절멸시키는 작전을 감행했다.
1621년, 일본인 용병(사무라이)까지 동원해 반다 지도자 수십 명을 참수했고, 주민을 산으로 몰아 굶기거나 바다로 내몰았다. 학살 전 약 1만 5,000명이던 반다 원주민은 학살·기아·강제 이주로 약 1,000명 수준으로 줄었다 — 인구의 90%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노예가 됐고, 텅 빈 섬에는 노예 노동으로 운영되는 육두구 플랜테이션이 들어섰다. 하나의 향신료를 독점하기 위해 하나의 민족을 지운 것이다.
설탕 가격 폭락으로 실직한 화교 노동자들의 소요가 일자,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당국은 성벽 안 화교 주민 전체를 적으로 규정했다. 1740년 10월, 약 일주일간 군대와 선원·용병이 집집마다 수색해 병원의 환자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약 1만 명의 화교가 살해됐고, 운하가 시신으로 막혀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에서 '앙케(Angke, 붉은 강)'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이던 1947년 12월, 네덜란드군은 서자바 라와게데 마을에서 게릴라를 숨겼다는 이유로 성인 남성 431명을 즉결 처형했다. 네덜란드는 오랫동안 이를 축소했으나, 2011년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이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배상을 명령했으며, 네덜란드 대사가 현지에서 공식 사죄했다. 2020년에는 국왕 빌럼알렉산더르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기의 "과도한 폭력"에 대해 사과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명분으로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잔혹한 정복을 벌였다.
'리비아의 도살자'로 불린 로돌포 그라치아니 장군은 키레나이카의 유목민 약 10만 명을 사막의 철조망 강제수용소로 몰아넣었다.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만 명이 죽었고, 이 지역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약 8만~10만 명). 저항 지도자 오마르 알 무흐타르는 1931년 수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35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의 몇 안 되는 독립국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근대 무기가 부족한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이탈리아 공군은 1925년 제네바 의정서로 금지된 **겨자가스(mustard gas)**를 마을과 가축, 수원에 무차별 살포했다. 전쟁 전체 사망자는 약 25만~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화학전이었지만,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 않았다.
1937년 2월, 아디스아바바에서 그라치아니 부왕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파시스트 민병대와 군인들이 3일간 보복 학살을 벌였다. 지식인·성직자를 표적으로 삼았고,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에서는 암살범을 숨겼다는 누명으로 수도사·수습생 수백 명을 총살했다. 3일간 수천에서 수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에티오피아 측은 약 3만 명을 주장하나, 이 수치는 논쟁적이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가장 먼저 시작해 가장 늦게까지 지속한 나라다. 약 400년간 아메리카로 끌려간 약 1,250만 아프리카인 중 절반 가까이(약 580만 명)가 포르투갈·브라질 국적 배에 실렸다. 이 주제는 이 연재의 별도 편(대서양 노예무역)에서 더 깊이 다룬다.
20세기 후반, 다른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철수할 때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독재 정권은 끝까지 식민지를 붙들고 전쟁을 벌였다.
바이샤 드 카산제 (앙골라, 1961): 면화 강제 노동에 항의한 농민들에게 포르투갈군이 폭격을 가했다. 사망자는 수백에서 (앙골라 측 주장) 수천 명까지 추정이 갈린다.
위리야무 학살 (모잠비크, 1972): 포르투갈군이 게릴라를 숨겼다는 의혹만으로 위리야무 마을 주민 약 400명을 학살했다. 영국 언론(더 타임스)이 이를 폭로해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고, 포르투갈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제국 | 주요 사건 / 지역 | 시기 | 추정 희생자 | 핵심 메커니즘 |
|---|---|---|---|---|
벨기에 | 콩고 자유국 고무 착취 | 1885~1908 | 약 120만~1,500만 (통설 ~1,000만) | 국왕 사유지, 할당제, 손목 절단 |
독일 | 헤레로·나마 제노사이드 (나미비아) | 1904~1908 | 약 7만~7만 5,000명 | 사막 봉쇄, 절멸 명령서, 우생학 실험 |
독일 | 마지마지 봉기 (탄자니아) | 1905~1907 | 약 7만 5,000~30만 명 | 초토화·기근 무기화 |
프랑스 | 알제리 정복·독립전쟁 | 1830~1962 | 독립전쟁만 수십만~150만(주장) | 동굴 훈증, 세티프·센강 학살 |
네덜란드 | 반다 제도 향신료 학살 | 1621 | 약 1만 4,000명 (원주민 90%) | 독점 위한 절멸·노예 대체 |
네덜란드 | 바타비아 화교 학살 | 1740 | 약 1만 명 | 도시 내 소수민족 청소 |
이탈리아 | 리비아 평정 | 1923~1932 | 약 8만~10만 명 | 강제수용소 아사 |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 침공 | 1935~1937 | 약 25만~30만 명+ | 국제법 위반 독가스 |
포르투갈 | 노예무역·식민 전쟁 | 16~20세기 | 노예 수송 약 580만 명 | 인간 상품화, 말기 학살 |
표의 수치는 모두 추정치이며, 특히 콩고·마지마지·알제리는 학계 편차가 매우 큽니다.
연도 | 제국 | 사건 |
|---|---|---|
1621 | 네덜란드 | 반다 제도 학살 — 육두구 독점 위한 원주민 절멸 |
1740 | 네덜란드 | 바타비아 화교 학살 |
1830 | 프랑스 | 알제리 침공 시작 |
1845 | 프랑스 | 다흐라 동굴 훈증 학살(앙퓌마드) |
1885 | 벨기에 | 베를린 회의 —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사유 승인 |
1890s | 벨기에 | 고무 붐, 공안군 테러 체제 확립 |
1904 | 독일 | 헤레로 봉기, 폰 트로타 절멸 명령 |
1905~1907 | 독일 | 마지마지 봉기와 기근 진압 |
1908 | 벨기에 | 레오폴드, 콩고를 벨기에에 매각·문서 소각 |
1923~1932 | 이탈리아 | 리비아 평정, 강제수용소 |
1935~1936 |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 침공, 독가스 살포 |
1937 | 이탈리아 | 예카티트 12 학살 |
1945 | 프랑스 | 세티프·겔마 학살 (종전일) |
1947 | 네덜란드 | 라와게데 학살 (인도네시아) |
1961 | 프랑스 | 파리 센강 학살 |
1961 | 포르투갈 | 바이샤 드 카산제 (앙골라) |
1972 | 포르투갈 | 위리야무 학살 (모잠비크) |
2011 | 네덜란드 | 라와게데 국가 책임 인정·배상 |
2012 | 프랑스 | 올랑드, 센강 학살 인정 |
2021 | 독일 | 헤레로·나마 제노사이드 공식 인정, 11억 유로 |
2025 | 나미비아 | 첫 제노사이드 추모의 날, 배상 재촉구 |
우리가 근대와 계몽의 요람으로 찬양하는 유럽의 수도들 — 브뤼셀의 왕궁, 파리의 대로, 베를린의 박물관섬, 암스테르담의 운하 저택 — 은 상당 부분 식민지 민중의 피와 뼈 위에 세워졌다. 벨기에 왕실의 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향신료 무역, 이 모든 것에 콩고와 반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이 학살들에는 공통된 문법이 있다. 그것은 우발적 폭력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산업화된 국가 폭력이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가,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근대 관료제와 인종주의 학문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그 동력이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경우에서, 학살 이후에는 은폐가 뒤따랐다. 레오폴드는 문서를 태웠고(1908), 프랑스는 센강 학살을 반세기 축소했으며, 이탈리아는 독가스 사용을 오래 부인했다.
그래서 이 편은 앞선 편들과 같은 자리에서 끝난다. 우리는 이 학살들의 정확한 규모를 여전히 모르며, 그 무지의 상당 부분은 만들어진 것이다. 콩고의 사망자 추정이 120만에서 1,500만까지 벌어지는 것은, 레오폴드가 인구를 세지 않았고 떠나며 기록을 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균열이 생기고 있다. 독일은 117년 만에 제노사이드를 인정했고(2021), 네덜란드 법원은 라와게데 유족에게 배상을 명령했으며(2011), 프랑스는 센강 학살을 인정했다(2012).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망각을 강요당했던 기억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이 연재가 하려는 일도 그 되돌아옴의 작은 일부다.
기억하는 일은 죽은 이들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타자를 비인간화할 때 문명이라는 외피가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벗겨지는지 — 이 여섯 제국의 기록은 그 준엄한 경고다.
Adam Hochschild, King Leopold's Ghost (1998) — 콩고 자유국. 사망자 추정은 산더슨 등의 인구학적 반론과 함께 읽을 것
Encyclopædia Britannica, "Congo Free State" 및 "Leopold II" — 사망자 추정 범위(100만~1,500만)
Jürgen Zimmerer & Joachim Zeller (eds.), Genocide in German South-West Africa — 헤레로·나마 제노사이드
CNN·Reuters·Al Jazeera 보도(2021, 2025) — 독일의 제노사이드 인정과 나미비아의 배상 요구
John Iliffe, A Modern History of Tanganyika — 마지마지 봉기, 사망자 7만 5,000~30만
Vincent Loth, "Armed Incidents and Unpaid Bills" 및 반다 제도 관련 VOC 연구 — 얀 피터스존 쿤
Alistair Horne, A Savage War of Peace — 알제리 전쟁
Ian Campbell, The Addis Ababa Massacre — 예카티트 12
The Times(1973)의 위리야무 학살 폭로 보도
본문의 사망자 수치는 모두 추정치이며, 편차가 큰 항목은 그 범위와 논쟁을 함께 표기했습니다. 이 편의 논지대로, 그 불확실성의 상당 부분은 인구 조사의 부재와 가해자에 의한 기록 파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안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