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0월 10일 첫 방송된 tvN 2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100일의 거짓말』(극본 류보리, 연출 유인식·김윤진)은 1932년 경성을 무대로, 밀정이 된 소매치기 이가경(김유정)과 조선총독부 통역관 김태웅/사토 히데오(박진영)의 100일간의 첩보극을 그린다. 항일 단체 '구국단'의 저격수 유소란(김현주)이 품은 복수의 뿌리는 13년 전, 곧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라마가 과거의 상처로 호출한 이름이 바로 제암리다.
우리는 제암리를 안다. 그러나 제암리만 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석 달 사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수십 건의 발포와 방화 가운데, 제암리가 '대표'가 된 이유는 희생자가 가장 많아서가 아니다. 그 참상을 외국인 선교사가 사진으로 남기고, 외신이 보도했기 때문이다. 기록된 학살은 기억되고, 기록되지 않은 학살은 사라진다. 이 글은 제암리에서 출발해 수촌리·수안·맹산·아우내로, 다시 1920년 간도와 1923년 간토로 이어지는 학살의 연쇄를 따라가며, 왜 어떤 죽음은 숫자가 되고 어떤 죽음은 숫자조차 되지 못했는지를 묻는다.
먼저 전체 흐름을 한눈에 보자.
날짜 | 장소 | 사건 | 희생 규모(출처별 범위) |
|---|---|---|---|
1919. 3. 3 | 황해도 수안 | 헌병분대 앞 시위대에 발포 | 사망 9~20여 명, 부상 수십 명 |
1919. 3. 10 | 평남 맹산 | 헌병분견소 안에 가두고 사살 | 사망 53~56명 |
1919. 4. 1 |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 | 헌병대 실탄 사격 | 사망 19명, 부상 30여 명 |
1919. 4. 5 | 경기 화성 수촌리 | 야간 포위·방화 | 가옥 42채 중 38채 소실 |
1919. 4. 15 | 경기 화성 제암리·고주리 | 교회당 감금·사격·방화 | 사망 23~29명 (+고주리 6명) |
1920. 10~1921 초 | 북간도 일대 | '경신참변' 초토화 작전 | 사망 3,600여 명(독립신문)~수만 명 |
1923. 9 | 일본 도쿄·가나가와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 사망 233명(일본 사법성)~6,661명(독립신문) |
희생자 수가 모두 '범위'로 적힌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이 글의 결론이다.
제암리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열흘에 걸친 '검거반'의 보복 작전이 쌓여 그 끝에 교회당의 불이 있었다. 출발점은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장안면·우정면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교회 전도사 김교철,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이끈 2,000여 명의 군중은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했다. 전국 대부분의 만세운동이 비폭력이었던 것과 달리, 화성의 시위는 간척사업과 농수산물 수탈에 대한 분노가 쌓인 조직적 무력항쟁이었다. 일제가 이 지역에 유독 가혹했던 배경이다.
보복은 4월 5일 새벽에 시작됐다. 발안 주재소의 경찰과 수비대가 수촌리를 포위하고 잠든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는 주민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후 4월 15일 새벽까지 검거반이 거듭 마을을 덮쳐 수촌리 가옥 42호 가운데 38호가 전소됐고, 1905년 세워진 수촌교회 예배당도 불탔다. 같은 날 오후, 이 검거반을 이끌던 보병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의 부대는 제암리로 향한다.
수촌리는 제암리보다 먼저 불탔지만, 외국인 목격자가 없었다. 그래서 사망자 수가 남아 있지 않다. 기록은 '주민들이 총검에 희생되었다'는 한 문장뿐이다. 기념관도 추모탑도 제암리에 있다. 수촌리가 제암리의 '전사'로만 기억되는 이유는 참상이 덜해서가 아니라, 사진이 없어서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 무렵,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군인 11명과 경찰이 제암리에 들어섰다. 그들은 "전할 말이 있다"며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교회 안으로 모이게 했다. 사람들이 들어가자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 너머로 사격했고, 이어 교회에 불을 질렀다. 창문으로 빠져나오려던 이들은 총검에 찔려 죽었다. 남편을 찾아 달려온 두 여성도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군인들은 교회뿐 아니라 마을 가옥 30여 채에 불을 놓았다.
같은 날 오후,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앞세운 수비대 6명은 500m 떨어진 팔탄면 고주리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4월 5일 발안 장날 시위를 이끈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과 그 일가 6명을 칼로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 사람과 집, 가축, 곡식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km 밖까지 퍼졌다고 전해진다.
희생자 수: 23명인가, 29명인가, 37명인가. 제암리 순국유적지의 공식 기록은 교회 안 희생자 23명이다. 그러나 보도와 연구에 따라 29명으로 기록되기도 하며, 미국 총영사 버그홀쯔가 1919년 4월 23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의 제목은 '일본군이 교회 안에서 한국인 37명 학살'이었다. 숫자가 흔들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해자가 증거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시신은 며칠간 방치됐고, 유골은 1982년 발굴 때까지 온전히 수습되지 못했다. 희생자 수의 불확실성은 학살의 부산물이 아니라 학살의 일부였다.
세계가 알게 된 경위. 4월 16일, 미국 영사 레이먼드 커티스와 선교사 언더우드, AP 통신원 테일러가 우연히 연기를 따라가다 현장을 발견했다. 이틀 뒤인 4월 18일,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 폐허와 유족을 촬영했다. 그가 쓴 보고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은 1919년 5월 27일자 『상하이 가제트』에 실려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제암리가 수십 건의 학살 중 '대표'가 된 것은 이 사진과 보고서 때문이다.
가해자의 처리. 일본군은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나 '임무 수행 중의 판단'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7년 공개된 당시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의 일기는, 군 수뇌부가 학살 사실을 알면서도 '저항이 있어 살상했다'는 식으로 발표하기로 합의했음을 보여준다. 학살 직후부터 숫자와 경위는 조직적으로 축소됐다.
스코필드가 촬영한 제암리 참상 현장. 출처: 지지씨 - 경기문화재단
3·1운동 첫날 시위가 있었던 7곳 가운데 서울을 뺀 6곳이 모두 북녘 땅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조직이 강한 평안도·황해도에서 운동은 가장 빨리, 가장 격렬하게 번졌고, 가장 먼저 피를 보았다. 그러나 분단 이후 이 지역의 사건들은 남쪽에서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제암리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맹산을 우리가 모르는 이유다.
황해도 수안 (3월 3일). 천도교 수안교구장 안봉하는 3월 1일 서울에서 온 독립선언서를 받고 시위를 준비했으나, 2일 밤 계획이 발각돼 주동자들이 헌병대에 끌려갔다. 3일 새벽 6시, 검거를 피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이 이끄는 130여 명이 헌병분대 앞에 모여 만세를 불렀고, 오전 11시와 오후 1시에 각각 100여 명, 150여 명이 다시 집결했다. 헌병은 세 차례 모두 발포했다. 황해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시위였다. 사망자는 자료에 따라 9명에서 20여 명까지 기록되며, 체포된 이들에게는 고문이 가해졌다. 고려대 정병욱 교수의 2019년 연구는 이 사건의 통설 자체를 비판한다. '헌병대 습격', '폭동'이라는 표현은 일본 헌병이 발포를 정당화하고 검사가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데, 기존 연구가 이를 사료 비판 없이 '공세적 시위'라는 긍정적 의미로 뒤집어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위대가 실제로 요구한 것은 '구속자 석방'이었다.
평안남도 맹산 (3월 10일). 맹산에는 3월 6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됐고, 천도교·기독교인 50여 명의 시위가 강제 해산됐다. 이후 산발적 시위가 이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천도교인 교사 한 명을 주동자로 몰아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했다. 석방을 요구하러 분견소 마당에 들어선 주민들을 향해 헌병은 문을 닫아걸고 사방에서 사격했다. 현장에서 54명이 숨졌다. 미국 선교사들이 수집한 자료집 『Korean Independence Outbreak』(컬럼비아대 버크도서관 소장)은 'Maingsan에서 53명 살해'로 기록했고, 국내 자료는 54명 또는 56명으로 적는다. 어느 쪽이든 제암리의 두 배가 넘는, 3·1운동 기간 단일 장소 최대 규모의 학살이었다. 맹산 주민들은 그 뒤에도 밤이면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맹산은 제암리보다 한 달 앞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기념관은 없다. 사진을 찍어 세계에 보낸 스코필드가 없었고, 1945년 이후에는 남쪽에서 갈 수 없는 땅이 됐다. 맹산은 두 번 지워졌다. 한 번은 일제에 의해, 한 번은 분단에 의해.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오전 9시 무렵부터 3,000여 명이 모였다.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이화학당 휴교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17세 유관순은 미리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고 행렬의 앞에 섰다.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로 다가가자 헌병이 발포했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가 합세해 총검을 휘둘렀다.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은 이 장면을 한 줄로 적는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향해 헌병이 발포하고 검으로 찔러 '즉사 19명, 중상 30명'.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56)과 어머니 이소제(44)가 그 19명 안에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일제 작성 「3·1운동 피살자 명부」에는 유중권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로만 적힌 여성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으로 기록돼 있다. 어머니는 이름조차 온전히 남지 못했다. 명부가 집계한 아우내 희생자는 20명이다.
죽음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유관순은 주재소 앞에서 부상자를 부축하며 헌병에게 항의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10월, 18세로 옥사했다. 오빠 유우석과 작은아버지 유중무도 투옥됐다. 작은아버지는 태형 60도를 맞고 빈사 상태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숨졌다. 현장 즉사자 19명에 투옥·고문 후 사망자를 더하면 아우내 만세운동의 순국자는 47명으로 집계된다. '19명'과 '47명'의 차이는 학살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의 차이다.
아우내가 기억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죽은 18명 가운데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3·1운동의 희생을 한 사람의 얼굴로 기억하는 것은 추모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나머지를 익명으로 밀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3·1운동은 국경 밖에서도 일어났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에서 2~3만 명이 만세를 불렀고, 중국 군벌 장쭤린의 군대가 발포해 17~19명이 죽었다. 만세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참변은 그 대가였다.
조작된 구실. 일본군은 출병 명분이 필요했다.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일본 측에 매수된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이른바 '훈춘사건'이다.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내세워 10월 중순부터 제19사단 등 2만 명 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투입했다. 작전의 공식 목표는 '불령선인 토벌'이었지만, 실제 표적은 독립군을 길러낸 한인 마을 자체였다.
초토화. 학살은 청산리 전투가 시작되기 12일 전인 10월 9일부터 시작돼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은 마을을 포위한 뒤 남자를 모아 총살하거나 참수하고, 여자와 아이가 보는 앞에서 생매장했다. 가옥과 학교, 교회에 불을 질렀다. 용정 인근 장암동(獐巖洞)에서는 교회에 주민 33명을 가두고 불을 지른 뒤, 유족이 수습한 시신을 다시 파내 태웠다. 제암리의 방식이 간도에서 수십 배로 반복됐다.
숫자.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간 북간도에서 피살 3,469명으로 보도했고, 12월까지 집계를 이어가 피살 3,693명, 가옥 소실 3,288채, 학교 41개, 교회 16개로 정리했다. 서간도에서는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이 1920년 5월부터 1921년 2월까지의 피해자 명단을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영문 자료는 최소 5,000명으로 적는다. 일본군 자체 보고는 '토벌' 성과로 수백 명을 적었을 뿐이다. 3,469명이라는 숫자는 조사원이 걸어서 닿을 수 있었던 마을만 센 것이고, 닿지 못한 마을은 숫자가 없다.
목격자. 간도참변에도 제암리의 스코필드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마틴(S. H. Martin)과 푸트(W. R. Foote)가 장암동 학살 현장을 조사해 보고서를 썼고, 『동아일보』와 외신이 이를 전했다. 그러나 간도는 조선이 아니었고, 중국 땅의 조선인은 어느 나라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세계는 제암리에 분노했지만 간도에는 침묵했다. 피해 규모가 수백 배였는데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의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쳤다. 점심 준비 시간이라 집집마다 불이 번졌고, 지진보다 화재로 더 많이 죽었다. 일본 내무성 집계로 사망 91,344명, 실종 13,275명이었다. 통신은 끊겼고, 도시는 불타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하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말이 퍼졌다.
누가 퍼뜨렸는가. 유언비어는 자연발생이 아니었다.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내무성 경보국은 각 지방에 '조선인이 방화·폭탄 투척을 하고 있으니 엄중 단속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정부가 소문을 공식 정보로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결성된 자경단은 길목마다 검문소를 세우고 '15엔 50전'을 발음시켜 조선인을 가려냈다. 발음이 어눌하면 죽창과 일본도, 쇠갈퀴로 살해했다. 군대와 경찰이 직접 살해한 사례도 다수 확인된다. 3·1운동과 간도의 무장투쟁 이후 일본 당국이 조선인에게 품은 공포와 적개심이, 재난을 만나 폭발했다.
233명, 2,613명, 6,661명. 일본 사법성은 자경단 재판 자료를 근거로 조선인 피살자를 233명으로 발표했다. 도쿄제국대 교수 요시노 사쿠조는 독자 조사로 2,613명을 추산했다. 도쿄의 천도교 청년회와 YMCA가 조직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은 일본 각지를 은밀히 돌며 생존자를 면담해 희생자를 집계했고, 그 결과가 1923년 12월 5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6,661명이다. 한국 학계와 추도비가 쓰는 숫자다. 중국인도 800여 명이 함께 살해됐다. 독립신문은 지진 이틀 뒤인 9월 3일 호외로 학살을 처음 보도했고, 사장 김승학이 파견한 조사원의 보고를 토대로 수차례 상세 기사를 냈다.
명단이 없는 이유. 1923제노사이드연구소가 2022년 자료집과 언론 보도를 모두 뒤져 이름을 확인한 희생자는 중복을 빼고 약 440명이다. 6,661명 가운데 6,200여 명은 이름이 없다. 연구소 성주현 부소장의 설명은 간단하다. 일본인들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시신을 서둘러 불태우거나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제암리에서 교회를 불태운 것과 같은 논리다.
100년 뒤의 부정. 일본 정부는 2023년 8월 관방장관 기자회견에서 '정부 조사에 한정하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매년 9월 1일 요코아미초공원 추도식에 보내던 추도문을 끊었다. 추도비의 '6,000여 명'이 부풀려졌다는 우익 단체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2019년 하버드대 램지어 교수는 자경단의 학살을 '정당한 방위 행위'라고 쓴 논문을 냈다. 숫자를 흔드는 것은 사건을 지우는 가장 조용한 방법이다.
일곱 사건의 희생자 수가 모두 범위로 적힌 것은 자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범위의 양 끝을 누가 만들었는지 보면 패턴이 드러난다.
사건 | 가해 측 숫자 | 피해 측·제3자 숫자 | 격차 |
|---|---|---|---|
제암리 | 아리타 무죄, 저항 중 살상으로 보고 | 23명(유적지) / 29명 / 37명(미 영사) | 사건 자체 축소 |
맹산 | 기록 공개 안 됨 | 53명(미 선교사) / 54~56명(국내) | 기록 부재 |
간도참변 | 수백 명('토벌' 성과) | 3,469~3,693명(독립신문) / 5,000명 이상 | 약 10배 |
간토 학살 | 233명(사법성) | 2,613명(요시노) / 6,661명(위문반·독립신문) | 약 29배 |
3·1운동 전체 | 사망 553명(총독부) | 사망 7,509명(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약 14배 |
세 가지가 반복된다.
첫째, 증거를 불태운다. 제암리의 교회, 장암동의 시신, 간토의 하천에 버려진 시체. 희생자 수의 불확실성은 학살이 끝난 뒤 생긴 것이 아니라 학살 행위 안에 설계돼 있었다. 시신이 없으면 숫자가 없고, 숫자가 없으면 사건이 없다.
둘째, 낮은 숫자를 공식 숫자로 만든다. 일본 사법성의 233명은 자경단 재판에 올라온 사건만 센 것이다. 재판에 오르지 않은 살인은 통계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총독부의 3·1운동 사망자 553명도 같은 방식이다. 낮은 숫자는 거짓말이 아니라 '집계 범위'의 문제로 포장된다. 그래서 반박하기 어렵다.
셋째, 높은 숫자의 근거를 공격한다. 100년이 지나면 피해 측 숫자의 명단이 불완전하다는 점이 공격 대상이 된다. '6,661명의 명단이 없지 않느냐'는 우익의 주장은 사실이다. 명단이 없는 이유가 시신을 태웠기 때문이라는 점만 빼면.
이 시리즈의 다른 편과 비교하면 3·1운동 이후 학살의 위치가 보인다. 영국 제국(2편)은 식민지 기록을 핸슬로프 파크로 옮겨 태웠고, 스탈린(7편)은 숫자를 문서고에 가둬 냉전기 '2,000만'이라는 과장을 낳았다. 몽골(4편)은 반대로 숫자를 부풀려야 유리했다. 일제의 방식은 영국과 같은 '기록 소각'에 가장 가깝되, 한 가지가 다르다. 일제는 기록을 태운 것이 아니라 기록이 생기기 전에 시신을 태웠다. 핸슬로프 파크에는 적어도 문서가 있었다.
원고 대비 정정 사항. 이 글은 제공된 초안의 날짜와 수치를 자료와 대조해 다음을 바로잡았다.
항목 | 초안 | 수정 | 근거 |
|---|---|---|---|
맹산 학살 날짜 | 3월 6일 | 3월 10일 (6일은 선언서 전달일) | 노컷뉴스, 컬럼비아대 KIO 자료 |
수촌리 피해 | 민가 40여 채 방화 | 4월 5일 첫 습격 후 15일까지 거듭 방화, 42호 중 38호 소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수촌교회' |
제암리 희생자 | 20여 명 | 23명(공식)~37명(미 영사 보고) 범위로 표기 | 제암리 순국유적지, 한국학 논문 |
간도참변 희생자 | 3,000~4,000명 | 3,469~3,693명(독립신문) / 5,000명 이상(영문 자료)로 출처 명시 | 프레시안, 영문 위키 |
간토 학살 | 6,000여 명 이상 | 233 / 2,613 / 6,661명 세 출처 병기 | 뉴스토마토, 서울신문 |
『100일의 거짓말』의 유소란은 13년 만에 경성으로 돌아와 총을 든다. 1932년에서 13년을 거슬러 가면 1919년이고, 드라마가 그 해의 상처로 호명한 곳이 제암리다. 선택은 자연스럽다. 제암리는 사진이 있고, 보고서가 있고, 기념관이 있다. 시청자가 아는 이름이다.
그러나 1919년 봄에 제암리만 불탄 것이 아니다. 열흘 앞서 수촌리가 탔고, 한 달 앞서 맹산에서는 두 배가 넘는 사람이 헌병분견소 안에서 죽었다. 이듬해 간도에서는 수천 명이, 그 3년 뒤 도쿄에서는 또 수천 명이 죽었다. 이 사건들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의 연쇄다. 3·1운동의 평화 시위를 총으로 진압한 경험이, 간도의 초토화 작전으로, 다시 간토의 유언비어로 이어졌다. 매번 시신은 불태워졌고, 매번 숫자는 범위로만 남았다.
드라마는 한 마을을 기억하게 한다. 역사는 그 마을이 왜 기억되고 나머지는 왜 기억되지 않는지를 물어야 한다. 제암리가 대표가 된 것은 가장 참혹해서가 아니라 가장 잘 기록돼서다. 기록되지 않은 학살은 없었던 학살이 된다. 그것이 가해자가 시신을 태운 이유이고, 우리가 숫자의 범위를 끝까지 적어야 하는 이유다.
경기일보, 일제의 야만성 폭로된 '제암리학살사건' (2022) · 제암리학살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부인 김씨 (2021)
노컷뉴스, 일제의 최대 만행 '맹산학살'은 왜 모르나 (2019)
컬럼비아대 버크도서관, Korean Independence Outbreak — 53 murdered at Maingsan (1919)
정병욱,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 『민족문화연구』 84 (2019)
서울신문, 총검 찔린 유관순, 헌병 군중 발포 막으려 총 잡은 채 '대한독립' (2019) · 3·1운동 피살자 명부 공개 (2013)
프레시안, 80년 전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그리고 경신참변 (2025) · 100년 전 간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광풍'
Wikipedia, Gando Massacre · Jeamni massacre
뉴스토마토, "간토대진재는 명백한 민족 대학살" 이만열 인터뷰 (2022)
노컷뉴스,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 인원 미지수, 추모 공간조차 없어 (2023)
서울신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 잔혹히 학살돼 — 이재동포위문반 기록 (2016)
미 국무부 FRUS, 1923년 간토대지진 피해 통계 (주일 대리대사 보고)
일간스포츠, 『100일의 거짓말』 첫 방송 리뷰 (2026) · 노컷뉴스, 류보리 작가 집필 의도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