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세 편에서 우리는 근현대의 참사를 다뤘다. 그 편들에서 사망자 수치의 불확실성은 주로 은폐에서 왔다 — 영국은 문서를 태웠고, 중국은 진실이 위로 전달되는 것을 막았다.
이번 편의 참사는 시대를 800년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 칭기즈 칸과 그 후계자들의 정복 전쟁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확실성의 성격이 정반대로 바뀐다. 몽골 정복의 사망자 기록은 은폐되기는커녕 과장됐다. 한 도시에서 174만 명이 죽었다는 식의 기록이 사료에 넘쳐난다.
그래서 이 편은 이전 편들과 반대 방향의 조심성을 요구한다. 이전에는 "실제로는 더 많이 죽었을 것"을 경계했다면, 여기서는 "사료의 숫자를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를 경계해야 한다. 몽골 정복의 규모를 정직하게 다루려면, 살육의 참혹함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중세 연대기의 과장을 걸러내는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한다.
이 균형 감각 자체가 이 편의 주제 중 하나다. 왜냐하면 그 과장된 숫자들이 우연이 아니라, 몽골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공포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3세기 몽골 정복으로 인한 총 사망자는 통상 3,000만~4,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넓게 잡는 추정은 1206년부터 1405년(티무르 시기까지 포함)에 걸쳐 2,000만~6,000만 명을 제시하기도 한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4억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인류의 약 7.5~10%에 해당하는 규모다. 비율로 따지면 20세기의 어떤 전쟁보다도 파괴적이었다.
여기서 정직하게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널리 인용되는 "약 4,000만 명"이라는 수치는 상당 부분 한 권의 책 — 『세계 인구사 지도(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1978) — 에서 나왔고, 그 책은 신뢰성이 의심받는 중국 호구(戶口) 통계에 크게 의존했다. 이 4,000만 명이라는 숫자가 환경 보고서(세계자연기금 WWF)와 교과서, 다큐멘터리로 퍼지면서 마치 확정된 사실처럼 유통됐지만, 그 뿌리는 생각보다 취약하다.
좀 더 보수적인 집계(HistoryExtra 등)는 몽골에 귀속되는 총 사망자를 약 3,500만~3,700만 명으로 보며, 그중 약 3,000만 명이 금(金)나라와의 전쟁(1211~1234) 한 곳에서 나왔다고 본다. 즉 몽골 정복의 최대 피해지는 흔히 떠올리는 중동이 아니라 중국 북부였다.
가장 실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중국의 인구 변화다.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몽골 정복 직전인 1200년경 약 1억 2,000만 명이던 중국 인구가 1300년대 후반에는 그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만 이 감소를 전부 몽골의 칼에 돌릴 수는 없다. 몽골 인구조사 데이터는 주된 인구 손실이 오히려 1290년 이후에 발생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전란만이 아니라 기근·역병·홍수, 그리고 무엇보다 호구 등록 체계의 붕괴(죽은 것이 아니라 집계에서 사라진 인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것이 이 편에서 첫 번째로 강조할 지점이다. 금나라 정복 전후 중국 북부의 호구 기록은 극적인 감소를 보이지만, "호구에서 사라진 것"과 "죽은 것"은 같지 않다. 전란으로 인구가 유민화하고 남송으로 피란하고 행정 체계가 무너지면, 실제 사망보다 통계상 감소가 훨씬 커진다. 학자들이 몽골 사망자 추정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몽골의 살육이 다른 정복 전쟁과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분노나 광기의 산물이 아니라 냉정하게 설계된 군사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네 가지 요소로 나눠 보자.
몽골의 기본 방침은 단순하고 잔혹했다. 저항 없이 항복한 도시는 공납을 조건으로 보존한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저항한 도시는 주민을 성 밖 평원으로 끌어내 병사 1인당 처형 할당량을 정해 조직적으로 도륙한다. 이는 즉흥적 학살이 아니라 회계에 가까운 절차였다.
핵심은 여기다. 몽골은 학살 그 자체보다 학살의 소문을 무기로 삼았다. 한 도시를 본보기로 철저히 지우면, 그 참상이 소문이 되어 다음 도시로 앞서 달려간다. 그러면 다음 도시는 싸우기도 전에 항복한다. 즉 잔혹함의 가시성이 곧 전력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전략이, 이 편 서두에서 말한 '과장된 숫자'의 근원이기도 하다. 몽골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가 크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살육의 규모가 부풀려질수록 심리전 효과가 커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한 천문학적 사망자 수 — 뒤에서 볼 니샤푸르의 174만 명 같은 — 는, 몽골의 잔혹함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를 퍼뜨리려던 몽골 자신의 의도가 함께 빚어낸 숫자다. 역설적이게도, 과장된 학살 기록은 그 자체로 학살 전략의 일부였다.
학살에도 실용주의가 관철됐다. 장인·기술자·통역·서기는 처형 대상에서 제외해 제국으로 이송했다. 니샤푸르에서 17만 명이 죽는 와중에도 숙련공 약 400명은 살려 노예로 데려갔다. 학살조차 이렇게 '선별적'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정책이었음을 보여준다.
몽골은 도시를 파괴할 때 성벽과 주민만 없앤 것이 아니라 생존 기반 자체를 지웠다.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에서 생명줄이던 카레즈(지하 관개 수로)를 파괴하면, 칼을 피한 사람도 기근과 사막화로 서서히 죽는다. 니샤푸르는 도시가 있던 자리를 갈아엎어 보리를 심을 정도로 철저히 지워졌다.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은 이때의 타격에서 수백 년간 회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 개별 학살을 살펴본다. 각 사건마다 중세 사료가 전하는 숫자와 현대 학계의 추정을 나란히 놓아, 앞서 말한 '과장 걸러내기'를 실제로 해보자.
샤푸르 성문 앞의 몽골군 (중세 페르시아 필사본). 출처: Wikipedia / Siege of Nishapur (1221) - Wikipedia
발단은 사소했다. 호라즘 제국의 총독이 몽골 대상(隊商)을 학살하고 사절을 처형하자, 칭기즈 칸은 전면 원정으로 응답했다. 오트라르·부하라·사마르칸트가 차례로 함락됐다.
니샤푸르(1221): 이 원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학살이다. 앞선 공격에서 칭기즈 칸의 사위 토쿠차르가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에 전사했고, 이에 대한 복수로 톨루이(칭기즈 칸의 막내아들)가 도시 주민 전원 학살을 명령했다. 토쿠차르의 미망인이 학살을 감독했다고 전해진다.
사료(주바이니): 174만 7,000명 사망. 남자·여자·아이의 머리로 각각 세 개의 피라미드를 쌓았고, 개와 고양이까지 죽였다고 기록.
현대 학계: 도시의 원래 인구 규모로 볼 때 10만~20만 명 수준으로 추정.
174만 명이라는 숫자가 왜 불가능한지는 간단하다. 그것은 당시 하와이나 로드아일랜드주 인구를 넘고,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총수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한 도시의 인구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숫자가 기록된 것 자체가 — 앞서 말했듯 — 공포 전략의 흔적이다.
메르브(1221): "세계의 어머니"로 불리던, 도서관 10곳에 15만 권의 장서를 보유했다는 대도시. 오마르 하이얌이 천문표를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사료: 70만 명(일부) ~ 130만 명(주바이니) 사망.
현대 학계: 이 역시 크게 할인해서 받아들인다. 당시 호라즘 제국 전체 인구가 300만 명 남짓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르겐치와 메르브 두 도시에서만 250만 명이 죽었다는 주바이니의 기록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대목이 사료 비판의 핵심이다. 우르겐치·메르브·니샤푸르·헤라트의 사료상 사망자를 모두 더하면 제국 전체 인구를 초과한다. 숫자는 문자 그대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 강조하건대 — 숫자가 틀렸다고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르브가 문명의 중심에서 폐허로 바뀐 것, 도시가 갈아엎어진 것은 고고학으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규모를 10분의 1로 줄여도 그것은 여전히 인류사 최악의 도시 학살에 속한다.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가 이끈 이 원정은 이슬람 세계의 심장을 겨눴다. 500년간 아바스 칼리파조의 수도이자 학문의 중심이던 바그다드가 표적이었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항복을 거부하자, 1258년 1월 말부터 2월 10일까지의 공성 끝에 도시는 함락됐고 일주일간 약탈·학살이 이어졌다.
사료: 훌라구 자신은 20만 명, 무슬림 측 사료는 80만~200만 명 사망을 기록.
현대 학계: 병참상의 제약을 근거로 낮은 쪽, 대략 9만~수십만 명으로 본다.
숫자와 별개로, 바그다드 함락의 문명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지혜의 집(Bayt al-Hikmah)**을 비롯한 대도서관들이 파괴됐고, 티그리스강이 버려진 책의 잉크로 검게, 학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지혜의 집'이 이 시점에 여전히 번성하던 단일 기관이었는지는 사료상 논쟁이 있으므로, "이슬람의 모든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식의 서술은 과장이다. 그럼에도 500년간 축적된 도서·건축·인적 자원이 이때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며, 이 사건은 통상 이슬람 황금시대의 상징적 종막으로 평가된다.
칼리프의 최후는 몽골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왕족의 피가 땅에 닿으면 재앙이 온다는 믿음 때문에, 훌라구는 알무스타심을 양탄자에 말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 피를 흘리지 않는 처형이었다.
훌 라구 칸의
바폐허가 된 '세계의 어머니', 메르브(Merv) 유적. 출처: Freda Bouskoutas / Getty Images
그다드 공성전 (1258년). 출처: Universal History Archive / Universal History Archive/Universal Images Group via Getty Images
앞서 보았듯 몽골 정복의 최대 인명 피해는 중국에서 발생했다.
금나라 정복 전쟁(1211~1234)은 23년간 이어졌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했다. 이후 남송 정복(1279년 완료)까지 더하면, 이 지역의 인구 손실은 앞서 본 대로 수천만 명 규모다. 다만 여기서도 '호구 감소 ≠ 사망'이라는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 전란·유민화·남송 피란·행정 붕괴가 통계상 감소를 크게 부풀렸다.
한국사와 직결되는 대목이다. 몽골은 1231년부터 약 30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했지만, 본토의 백성은 무방비로 유린당했다. 특히 1254년 차라대의 침입 때는 한 해에 20만 6,8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대구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경판과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이 시기 몽골군에 의해 소실됐다. 오늘날 전하는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은 바로 이 국난 속에서, 불력으로 몽골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강화도에서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는 1259년 강화(講和)하고 원의 부마국이 되는 길을 택함으로써 왕조 자체는 존속시켰다.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끈 몽골군은 루스(러시아)의 여러 공국을 무너뜨렸다. 1240년 키예프(오늘날 키이우)가 파괴됐다. 이후 몽골은 폴란드(레그니차 전투)와 헝가리(모히 전투, 1241)까지 진출해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으나, 1241년 대칸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에 후계 계승을 위해 회군하면서 서유럽은 침공을 면했다.
연도 | 사건 |
|---|---|
1206 | 테무진,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 — 몽골 통일 |
1209~1227 | 서하(西夏) 정복 전쟁 |
1211~1234 | 금나라 정복 — 화북 인구 격감(몽골 정복 최대 피해지) |
1219~1221 | 호라즘 원정. 오트라르·부하라·사마르칸트·우르겐치 함락 |
1221 | 니샤푸르·메르브·헤라트 학살, 관개 시설 파괴 (사료상 도시별 수십만~백만, 현대 학계는 대폭 할인) |
1227 | 칭기즈 칸 사망 |
1231~1259 | 고려 침공(여몽전쟁) — 6차 침입, 초조대장경·황룡사탑 소실 |
1237~1242 | 바투의 유럽 원정. 1240년 키예프 파괴, 1241년 오고타이 사망으로 회군 |
1258 | 훌라구의 바그다드 함락 — 아바스 칼리파조 멸망, 이슬람 황금시대의 종언 |
1279 | 남송 멸망 — 원(元)의 중국 통일 완성 |
1287 | 파간 왕국(미얀마) 정복 |
14세기 | 흑사병, 몽골이 연 교역로를 타고 유라시아로 확산 |
몽골 정복은 이 연재의 다른 편들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근대적 의미의 '제노사이드'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몽골의 학살은 특정 민족·종교의 절멸이 아니라, 저항한 도시를 본보기로 지우는 군사적·정치적 계산이었다. 항복하면 살고 저항하면 죽는다는 원칙은 잔혹했지만 '선택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전근대 정복 전쟁의 극한 형태이지, 20세기적 절멸 이데올로기와는 성격이 다르다.
둘째, 규모의 불확실성이 반대 방향에서 온다. 1~3편의 참사는 가해자가 기록을 지워 규모를 축소시켰다. 몽골의 경우, 오히려 기록이 규모를 부풀렸다 — 그것도 가해자 자신의 심리전 전략에 의해. 이것이 이 편이 남기는 방법론적 교훈이다. 사료의 숫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일 수 있다. 174만이라는 숫자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몽골의 공포 전략에 800년 늦게 굴복하는 셈이고, 반대로 "다 과장이니 별것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실재한 폐허 앞에서 눈을 감는 것이다. 역사를 정직하게 읽는다는 것은 이 두 오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몽골 정복의 양면성을 기억하자. 정복이 끝난 뒤의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는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교역망으로 연결해 동서 문물 교류를 촉진했다. 마르코 폴로가 대륙을 횡단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질서 덕분이다. 그러나 바로 그 교역로가, 한 세기 뒤 흑사병이 유럽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다. 유라시아를 잇는 길은 비단과 함께 죽음도 실어 날랐다. 제국이 연 세계는 그렇게, 그것이 앞서 흘린 피와 무관하지 않은 또 다른 대량 죽음으로 이어졌다.
다음 편에서는 다시 20세기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냉전기 국가 이데올로기가 자국민을 겨눈 사건 — 스탈린 체제의 홀로도모르와 대숙청, 굴라그다. 그곳에서 우리는 '숫자의 정치학'이라는 이 연재의 또 다른 축과 다시 마주친다.
ʿAṭā-Malik Juvayni, Tārīkh-i Jahān-gushā(『세계 정복자의 역사』) — 니샤푸르·메르브 학살의 주요 1차 사료(단, 숫자는 과장으로 평가됨)
Rashīd al-Dīn, Jāmiʿ al-tawārīkh(『집사集史』) — 몽골 제국 통사
David Morgan, The Mongols — 니샤푸르 학살 및 사료 비판
Colin McEvedy & Richard 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1978) — "약 4,000만 명" 통계의 출처(신뢰성 논쟁 있음)
중국 호구 통계 및 인구사 연구 — 화북 인구 붕괴 분석('호구 감소 ≠ 사망' 유의)
『고려사(高麗史)』 — 여몽전쟁 및 포로 규모 기록
각 공성전(니샤푸르·메르브·바그다드) 관련 현대 학계의 하향 추정치
본문의 사망자 수치는 모두 추정치입니다. 특히 이 편에서는 중세 사료의 수치가 심하게 과장된 경우가 많아, 사료상 숫자와 현대 학계의 추정을 구분해 표기했습니다. 숫자의 과장을 걸러내되 학살의 실재를 축소하지 않는 것이 이 편의 원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