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 3편, 마오쩌둥 시대의 대학살 — 평시에 벌어진 인류사 최대의 아사

iam 2026.07.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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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a5b4e168137c.png3. 마오쩌둥 시대의 대학살 — 평시에 벌어진 인류사 최대의 아사

들어가며: 전쟁도, 침략도, 식민 지배도 없이

1편에서 우리는 정복자가 전염병을 방패이자 무기로 삼는 것을 보았고, 2편에서는 제국이 학살의 기록 자체를 불태우는 것을 보았다. 이번 편의 참사는 그 둘과 다르다.

마오쩌둥 시대의 대기근에는 외적도, 식민 지배자도, 전염병도 없었다. 자국 정부가 자국 농민을, 평화로운 시기에, 정책과 정보 왜곡만으로 굶겨 죽였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로.

미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의 표현을 빌리면, 20세기에 발생한 모든 기근 사망자의 약 절반이 1958~1962년 단 4년간의 중국에서 나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약진운동의 대기근은 이 연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번 편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참사를 다룬다. 정책과 정보 통제가 낳은 아사(餓死)의 참사(대약진운동, 1958~1962)와, 이념과 광기가 낳은 폭력의 참사(문화대혁명, 1966~1976)다. 성격은 다르지만 둘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 왜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는가.


1부. 대약진운동의 대기근 (1958~1962)

규모: 1,500만에서 4,500만까지

대약진운동 기근의 사망자 추정은 이 연재의 어떤 사건보다도 편차가 크고, 그 편차 자체가 이야깃거리다.

추정자

사망자

근거

중국 관영 학계

약 1,500만~2,000만 명

공식 인구 통계

차오수지(曹樹基)

약 3,250만 명

성(省)별 지방 인구 데이터

양지성(楊繼繩)

약 3,600만 명

신화통신 기자로서 접근한 내부 문서

천이쯔(陳一諮)

약 4,300만 명

1980년대 체제 내 조사

프랑크 디쾨터

최소 4,500만 명

지방 공안·당 문서고

위시광(余習廣)

약 5,500만 명

당 문서고

주목할 점은 가장 큰 숫자들이 중국 체제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양지성은 신화통신 기자였고, 차오수지는 상하이의 대학교수이며, 천이쯔는 자오쯔양의 개혁 브레인이었다. 이들은 반공 선전가가 아니라, 문서고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동시에 이 글은 학계의 반론도 감춰선 안 된다. 아일랜드 경제학자 코맥 오 그라다는 디쾨터가 '정상 사망률'을 비현실적으로 낮게(1,000명당 10명) 잡아 사망자를 부풀렸다고 비판했다 — 혁명 직후 중국의 실제 사망률은 1,000명당 25명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라면 4,500만 명에는 노령·질병·사고로 인한 통상 사망이 상당수 섞여 있을 수 있다. 이 연재의 원칙대로, 우리는 가장 방어 가능한 하한선(1,500만~2,000만)조차 인류사 최악의 기근이며, 상한선(4,500만)은 논쟁 중임을 함께 기억한다.

이것은 가뭄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오랫동안 이 시기를 **"3년간의 자연재해(三年自然災害)"**라 불러왔다. 1959년에 실제로 일부 지역에 가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류사오치가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내놓은 유명한 평가 — "3할은 천재(天災), 7할은 인재(人災)" — 조차 인재의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못 박았고, 오늘날 대다수 역사가는 인재의 비중을 그보다 훨씬 높게 본다. 무엇이 이 참사를 만들었는가.

① 인민공사와 집단화. 농민의 사적 경작과 식량 보유가 금지되고 공동식당(公共食堂) 체제가 강제됐다. "밥은 공짜"라는 구호 아래 초기에 식량이 낭비됐고, 무엇보다 개인의 생산 유인이 완전히 붕괴했다. 아무리 일해도 내 것이 되지 않는 밭을 열심히 갈 이유가 없었다.

② 허위 보고의 악순환("放衛星"). "위성을 쏘아 올린다(放衛星)"는 말처럼, 지방 간부들은 경쟁적으로 수확량을 몇 배씩 부풀려 보고했다. 무 한 뙈기에서 수만 근이 났다는 식의 날조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문제는 국가가 이 허수를 기준으로 곡물을 징발했다는 것이다. 서류상 풍년이니 그 비율만큼 걷어가면, 실제 농촌에는 종자와 식량까지 남지 않았다.

③ 토법고로(土法高爐). "철강 생산량으로 영국을 따라잡자"는 구호 아래 마을마다 재래식 용광로를 세웠다. 농민들은 솥과 농기구, 심지어 문고리까지 녹여 넣었지만 나온 것은 쓸모없는 잡철 덩어리였다. 그사이 정작 곡식은 밭에서 썩어갔다 — 수확할 사람이 모두 제철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④ 제사해 운동(除四害) — 참새의 복수. 참새가 곡식을 쪼아 먹는다는 이유로 전국적 박멸 운동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냄비를 두드려 참새가 앉지 못하고 날다 지쳐 떨어져 죽게 하는 방식까지 동원됐다. 그러나 참새는 곡식만이 아니라 해충도 먹었다. 천적이 사라지자 메뚜기 등 해충이 창궐해 흉작을 가중시켰다. 뒤늦게 참새를 해충 명단에서 빼고 빈대로 교체했지만 이미 늦었다.

⑤ 기근 속의 수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던 1960~1961년은 오히려 중국의 곡물 수출 정점기였다. 마오는 소련에 대한 채무를 앞당겨 식량으로 상환했고, 제3세계 국가들에 대외 원조로 곡물을 보냈다. 대국의 체면과 이념이 자국민의 목숨보다 앞섰다.

6a5c0a0416d01.png 대약진운동의 상징, 토법고로(재래식 용광로).

출처: 위키백과 / 파일:Backyard furnace4.jpg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6a5c0a6922fbe.png 참새 박멸을 독려하는 제사해 운동 포스터.

출처: Wikipedia / Four Pests campaign - Wikipedia

신양 사건(信陽事件) — 한 지역의 축소판

이 모든 요인이 어떻게 결합해 사람을 죽였는지, 허난성 신양(信陽) 지구의 사례가 압축해 보여준다.

인구 850만의 곡창지대였던 신양에서, 1959년 10월부터 1960년 4월 사이 최소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신양 지구 당서기 장수판(張樹藩)의 회고에 따르면, 1959년 실제 예상 수확량은 15억~20억 근이었지만 당 위원회는 루산 회의의 좌경 분위기에 눌려 36억 근이라는 허수를 보고했다. 국가는 그 허수에 맞춰 징발 할당량을 매겼고, 신양은 농민의 식량과 종자까지 모조리 긁어내 8억 근 할당을 채웠다. 수확 직후부터 마을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더 참혹한 것은 그다음이다. 할당을 못 채운 생산대는 "곡식을 숨겼다(瞞產私分)"는 혐의를 뒤집어썼고, "두 노선의 투쟁"이라는 이름의 폭력적 곡물 색출 운동이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항의하면 매질을 당했고, 맞아 죽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대량 아사가 시작되자 지역 당국은 주민의 탈출(流亡)을 막고, 외부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 1만 2,000여 통을 우체국에서 압류했다. 마오가 신양의 실상을 담은 솔직한 보고를 받은 것은 1960년 10월 — 이미 100만 명이 죽은 뒤였다.

루산 회의(廬山會議) — 참사를 되돌릴 수 있었던 순간

이 연재를 관통하는 아마르티아 센의 명제 — "언론과 비판이 작동하는 곳에 대기근은 없다" — 가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는 지점이 1959년 여름의 루산 회의다.

1959년 초 이미 여러 지역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자, 노장 군사지도자 펑더화이(彭德懷) 원수가 마오에게 대약진의 문제를 지적하는 편지를 올렸다. 그는 후난 시찰 중 한 상이군인에게 "곡식은 흩어지고 감자 잎은 시들고 젊은이는 제철소로 끌려가 여자와 아이만 수확을 하니 어찌 살아남겠는가"라는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오는 이 비판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루산 회의에서 마오는 펑더화이를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아 실각시켰다.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겁에 질린 전국의 간부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려 마오의 펑더화이 공격을 지방 단위에서 그대로 복제했다. 양지성의 표현대로 "위가 하는 것을 아래가 모방하니, 상층부의 정치 투쟁이 하층부에서 더 잔혹한 형태로 재현"됐다. 곡식을 숨겼다는 혐의로 농민을 때려잡는 "반은닉(反瞞產) 투쟁"이 여기서 촉발됐다. 신양의 당서기 톈부샤오는 실상에 괴로워하다 "작은 펑더화이"로 몰려 비판받고 1959년 10월 자살했다.

루산 회의의 교훈은 명확하다. 1959년 여름에 방향을 틀었다면 희생자는 수백만 명 선에서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의 목소리를 숙청함으로써, 억제 가능했던 재난이 인류사 최대의 기근으로 폭발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체제에서, 정보는 위로 올라갈수록 왜곡됐고 참사는 교정 불가능해졌다.

"기근"으로는 부족한 죽음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다. 디쾨터의 문서고 연구가 밝힌 것은, 이 참사가 단순한 '굶주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4,500만 사망자 중 최소 250만 명이 맞아 죽거나 고문·즉결 처형으로 사망했다고 추정한다(이 수치 역시 신양 등 일부 지역 데이터의 확대 추정이라는 반론이 있다). 곡물 색출 과정에서 농민이 매질로 죽고, "게으른 자·불량분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배급에서 배제돼 굶겨졌으며, 100만~300만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오가 1959년 상하이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면 사람이 굶어 죽는다. 인민의 절반이 죽어 나머지 절반이 배불리 먹는 편이 낫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기록은, 이 참사의 성격을 섬뜩하게 요약한다.


2부. 문화대혁명 (1966~1976) — 이념이라는 이름의 광기

성격이 다른 참사

대기근이 정책 실패와 정보 왜곡의 참사였다면, 문화대혁명은 이념적 폭력의 참사다. 굶주림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때려죽인 사건이다.

권력 일선에서 밀려난 마오는 1966년, 관료 체제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를 겨냥해 청년들을 동원했다. **홍위병(紅衛兵)**이 탄생했고, "네 가지 낡은 것(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 타파(破四舊)"의 광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교사, 지식인, 옛 지주, "계급의 적"으로 지목된 이들이 조리돌림(批鬥)과 구타 속에 죽어갔다. 사찰과 문화재가 파괴됐고, 자녀가 부모를, 제자가 스승을 고발했다.

규모: 다시, 알 수 없음

문화대혁명의 사망자 추정도 폭이 넓다.

추정 범위

근거

앤드루 월더 등의 실증 연구

약 110만~160만 명 (특히 1966~1969 집중기)

표준 참고문헌·아카이브

약 50만~200만 명

일부 집계·평균

약 300만 명까지

지역 학살 별도 집계

전국 학살로만 최소 30만 명

집계가 갈리는 이유는 2편의 대영제국과 정확히 같다. 기록에 대한 국가의 통제다. 문혁 연구자 쑹융이(宋永毅)의 말대로, 문화대혁명 사망자 통계는 중국 정부에게 여전히 "고도 기밀(state secret)"이며, 당국은 자국 학자의 독립적 연구를 금지하고 해외 학자의 현지 연구를 방해한다. 참사의 규모를 모르는 것이 이번에도 우연이 아니다.

광시 대학살(廣西大屠殺) — 극한의 잔혹

문화대혁명의 지역 학살 중 가장 참혹했던 것이 1967~1968년 광시(廣西) 자치구의 사건이다. '반란파'와 '보수파' 홍위병의 파벌 투쟁이 "계급 대오 정화(淸理階級隊伍)" 캠페인과 결합하면서, 조직적 집단 학살로 번졌다.

쑹융이가 밀반출한 광시 당 기밀문서에 따르면, 문혁 기간 광시에서 비정상 사망자는 약 15만 명에 이르며, 이 중 95% 이상이 무장 충돌이 아니라 직접 살해·고문·학대로 사망했다. 공식 조사도 성 전체 사망자를 10만~15만 명으로 추산한다. 살해 방식은 참수, 구타, 생매장, 투석, 익사 등 극단적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20세기 문명사의 가장 어두운 기록으로 만든 것은 **집단적 식인(食人)**이다. 우쉬안(武宣)현 등에서 "계급의 적"으로 지목된 이들이 살해된 뒤 그 장기와 살점이 "혁명적 충성"의 표시로 공개적으로 나뉘어 먹혔다. 우쉬안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지리 교사를 때려죽인 뒤 강가로 끌고 가 다른 교사에게 심장과 간을 도려내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광시 전체 27개 현(전체의 3분의 2)에서 식인 보고가 있었고, 한 현에서만 421명이 먹혔다는 독립 연구자의 집계도 있다. 이는 기근에 의한 생존형 식인이 아니라 이념이 만들어낸 정치적 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밖의 참상

문화대혁명의 폭력은 광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후난성 다오현(道縣)에서는 1967년 두 달여간 수천 명이 학살됐고("다오현 사건"), 베이징 근교 다싱(大興)현에서도 "흑오류(黑五類, 지주·부농·반혁명분자·악질분자·우파)"와 그 가족에 대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1968년부터 도시 청년 수천만 명이 농촌으로 보내진 상산하향(上山下鄉, 하방) 운동은 직접적 학살은 아니었으나, 한 세대의 교육과 삶을 통째로 파괴했다.


통합 연표

연도

사건

1958

대약진운동 개시. 인민공사 설립, 토법고로·제사해 운동 전개

1959.7~8

루산 회의 — 펑더화이가 대약진을 비판했다 실각. 비판 통로 차단, 좌경 강화

1959.10~1960.4

신양 사건 — 곡창지대에서 최소 100만 명 아사, 구조 요청 편지 압류

1959~1961

대기근 절정. 허난·안후이·쓰촨·간쑤 등 농촌 궤멸

1960.10

마오, 신양 실상 보고받음. 조사팀 파견 시작

1960~1961

기근 정점기이자 곡물 수출 정점기

1961 초

대약진 정책 후퇴 시작, 서방으로부터 곡물 수입 개시

1962

7천인 대회 — 류사오치 "3할 천재, 7할 인재" 발언. 정책 조정

1966.5

문화대혁명 개시. 홍위병 운동·파사구(破四舊) 폭발

1967~1968

전국적 무장 투쟁(武鬪), 광시 대학살·다오현 사건 등 지역 학살

1968~

상산하향(하방) 운동 — 도시 청년 대규모 농촌 이주

1971

린뱌오 사건 — 마오의 후계자 린뱌오 실각·사망, 문혁 동력 약화

1976

마오쩌둥 사망, 4인방 체포 — 문화대혁명 종결

1981

중국공산당 "역사결의" — 문혁을 공식적으로 "내란(浩劫)"으로 규정


결론: 침묵이 만든 참사

마오쩌둥 시대의 두 참사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나는 굶주림, 하나는 폭력. 하나는 정책의 실패, 하나는 이념의 폭주. 그러나 둘을 관통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체제.

대기근에서 펑더화이는 문제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숙청됐고, 그 숙청이 전국의 입을 막아 억제 가능했던 기근을 재앙으로 키웠다. 신양의 관리들은 실상을 감추고 구조 요청 편지마저 압류했다. 문화대혁명에서는 침묵을 넘어, 고발하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이 됐다 —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스승을, 부모를 고발했다.

그래서 마오 시대의 참사는 2편의 대영제국과 뜻밖의 지점에서 만난다. 우리는 그 규모를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하며, 그 무지는 우연이 아니다. 영국이 탈식민 과정에서 문서를 불태웠다면, 중국은 애초에 진실이 기록되고 위로 전달되는 것 자체를 봉쇄했다. 그리고 지금도 문화대혁명 사망 통계는 "국가 기밀"로 남아 있고, 대약진 기근은 여전히 "3년간의 자연재해"라는 완곡어법 뒤에 놓여 있다.

1편의 결론이 "병원체에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것을 다룬 인간에게는 있었다"였다면, 3편의 결론은 이렇다. 가뭄에는 입이 없지만, 그것을 재앙으로 키운 침묵에는 이름과 책임이 있다. 아마르티아 센이 옳았다. 대기근은 강우량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다음 편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전근대 최대의 살육을 다룬다. 저항하는 도시의 주민 전원을 본보기로 도륙해 다음 도시의 항복을 얻어낸 제국 — 몽골이다.


참고한 주요 자료

본문의 사망자 수치는 모두 추정치이며, 특히 대약진 기근(1,500만~5,500만)과 문화대혁명(50만~300만) 모두 학계 편차가 매우 큽니다. 이 편의 논지대로, 그 편차의 상당 부분은 자료의 부재가 아니라 정보에 대한 국가적 통제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안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6a5c094d38973.pngfrom : 집단화와 무리한 노동 동원. 출처: laurenream.github.io / 1959-62: Great Chinese Famine

https://laurenream.github.io/culturalrevolution/greatchinesefam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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